김규성
金奎晟1863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6)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6) 1863년경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황주면(黃州面) 인교면(仁橋面) 소매리(小梅里)에서 태어났다. 천도교인으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당시 57세로 3월 2일 벌어진 황주면 남천장터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평남 중화군(中和郡) 출신의 천도교인 최창룡(崔昌龍)이 서울의 만세 시위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황주로 와서 천도교 황주교구 교구장인 김성준(金聲駿)을 만났다. 최창룡과 만난 김성준은 황주면 황강리(黃崗里)의 황기타(黃己拕) 등과 만세 시위에 대해 논의한 결과, 황주면 성남리(城南里)의 장날인 3월 2일 남천(南川) 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독립선언서 배포는 황기타가 담당하기로 하였고, 황주면의 주요 천도교인들에게도 만세 시위 계획을 미리 알리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벽성리(碧城里)의 조진영(趙鎭永), 성남리의 김병식(金炳植), 황강리의 김광섭(金光燮)·최석길(崔錫吉) 등에게 계획을 통보하였고, 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독려하였다. 3월 2일 오후 2시경 황주면 성남리 남천시장에서 수백 명의 천도교인과 함께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장 곳곳에 독립선언서를 붙이고, 시위대와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 장꾼들이 시위대에 적극 호응하면서 만세 시위의 규모가 커졌다.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대가 경찰서 앞으로 행진하자, 경찰들은 선두에서 만세 시위를 이끌던 강형섭(康亨燮)과 김병식을 체포하였다. 이에 시위대와 경찰서 앞으로 가서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한편, 경찰서의 유리창을 부수었다. 나아가 시위대는 기독교 예배당 앞에서 대열을 정돈하고 일제히 독립 만세를 외쳤다. 예배당 앞에서 시위대가 만세 시위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니, 기독교인이 다수 동참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더 증가하였다. 시위대는 독립 만세를 외치며 남천시장을 계속 행진하였다. 이날 만세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황주면뿐 아니라 구락면(龜洛面)·구성면(九聖面)·도치면(都峙面) 등 황주군의 거의 전 지역에서 왔다. 만세 시위를 마무리하고 천도교인 200여 명은 천도교 황주교구에 회집하여 휴식을 취하였다. 그 사이 경찰들은 다른 지역으로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소방조까지 동원하여 탄압하였다. 또한, 천도교인들의 가택을 수색하기도 하였다. 오후 5시경 만세 시위의 주동자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경찰들이 천도교 황주교구실로 진입하였다. 그 과정에서 황주면의 황기타·최석길·조진영, 송림면의 김시원(金始圓)·나희풍(羅喜豊), 구락면의 지봉서(池鳳瑞), 구성면의 채보선(蔡寶善), 도치면의 박동일(朴東日), 삼전면의 최하석(崔河錫), 인교면의 최찬형(崔賛衡), 천주면의 김희걸(金稀杰), 청룡면의 임재창(林在昌) 등 80여 명과 함께 붙잡혀 황주경찰서로 연행되었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1919년 5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1919년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