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英浩
趙英浩1865. 3. 22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6)
관련 사건
- · 갑산군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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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06) 1865년 3월 22일 함경남도 갑산군(甲山郡) 회린면(會麟面) 후지리(厚地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갑산군 장평면(長平面)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평양(平壤)·안주(安州)·의주(義州)·선천(宣川)·원산(元山)·진남포(鎭南浦)에서 만세운동이 거행되었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천도교, 개신교, 불교계 대표 및 학생대표들은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추진하기 위해서 인편을 통해서 만세시위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전국 각 지역으로 전달하였다. 함경남도 내 천도교인들이 도내에서 만세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갑산군 장평면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3일 함경남도 단천(端川)의 천도교 지도부는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다. 천도교 지도부는 단천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만세운동을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진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결의의 일환으로 서봉화(徐鳳化)와 최봉천(崔鳳天)은 갑산군 지역도 만세시위를 함께 전개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결국 단천군(端川郡) 천도교 인사들은 서봉화가 단천, 그리고 최봉천이 갑산군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3월 8일 최봉천은 갑산군으로 향하여 이인면(里仁面) 가재리(加財里)의 천도교 분교실에서 김길렬(金吉烈)을 만나서 3월 15일 갑산 일대에서 천도교인들이 주도를 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 3월 9일에는 장평면(長平面) 서부리(西部里) 천도교당과 화장리(化墻里)의 정완조(鄭完朝)를 각각 방문하였다. 그 자리에서 최봉천은 해당 지역의 천도교 인사들에게 3월 15일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갑산군 내 천도교 인사들은 다른 지역 사람인 최봉천이 제안한 3월 15일 만세시위 실행을 쉽게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갑산군 천도교구의 전도사 김명수(金明洙)는 풍산군(豐山君) 안산면(安山面) 하지경리(下地境里)의 천도교구에서 보낸 서신을 받았다. 그 편지에는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흐름에 갑산군 천도교인들이 동참해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권유하는 내용 전 민족이 궐기해야 한다는 내용의 격문이 담겨 있었다. 그 서신을 받은 김명수는 천도교인들이 주도하여 갑산군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다. 3월 12일 김명수는 회린면 후지리(厚地里)에 사는 정국태(鄭國泰)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 자리에서 정국태, 정수웅(鄭秀雄)과 함께 3월 15일 갑산군에서 대규모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5일 오후 2시 정수익(鄭秀益)·정창원(鄭昌元)·김용균(金龍均)·조석준(趙錫俊)·조병학(趙秉學)·주남호(朱南浩)·박문옥(朴文玉)·조종현(趙宗鉉) 등과 함께 장평면 서부리의 갑산군 천도교당으로 갔다. 조병학은 정수웅의 지시에 따라서 태극기를 게양해 만세시위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200여 명으로 구성된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혹한의 추위 속에서 일제 군경의 저지를 물리치고 갑산군청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일제 군경은 갑산군으로 급파된 혜산진(惠山鎭) 수비대와 함께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때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일제 군경에게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5월 2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8월 9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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