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哲魯
姜哲1883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흥업단
- · 광정단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11) 1883년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강철증(姜哲曾)이다. 이 이름은 본인이 썼는지는 불분명하나 일제 첩보자들의 보고문서에 강철로(姜哲魯)를 잘못 표기해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가족관계와 성장 과정은 자료의 한계로 알기 어렵다. 1920년대 초부터 서간도(西間島) 창바이현(長白縣)에 근거지를 구축한 독립군단(獨立軍團)의 간부로 활동한 기록이 있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른 시기 함경도 출신의 인사들이 대거 이주한 창바이현으로 망명해 독립군 기지 개척에 참여하고 독립군단을 성립시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1921년경 창바이현 18도구(道溝)에 거주하며 흥업단(興業團) 지단(支團)의 재무장(財務長)으로 활동하였다. 흥업단은 1920년 창바이현과 접해 있는 푸쑹현(撫松縣)에서 설립되었다. 본부 설립 후 흥업단 지도부는 국내 진입이 쉬운 창바이현에 지단을 설치한 것이다. 창바이현의 지단장은 김창일(金昌一)이었다. 조직의 자금을 책임지는 재무장은 독립운동 단체에서 단장 또는 사령관에 버금가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독립군들이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집해 온 자금을 관리하고 지출해야 하는 직책이었기에 구성원 모두의 신망을 받지 않으면 수행하기 어려웠다. 흥업단 지단은 효과적인 항일 무장 활동을 위해 1921년 1월 15일 이들 독립군단과 독립군연합회(獨立軍聯合會)를 결성하였다. 이 연합회는 각 군단의 체제는 그대로 유지하고 항일 활동을 위한 특정 사항을 협력하기 위해 만든 결성체였다. 이 연합회의 회장은 군비단 단장인 이희삼(李熙三)이 선임되었다. 1921년 중반 이후, 보다 효율적 항일 활동을 위해 흥업단은 대진단 지단을 흡수해 통합하였다. 그리고 하반기 이후 계속 단세 확장에 노력해 이듬해 2월경에는 군비단과 통합해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을 성립시켰다. 국민단은 다시 그해 4월경 태극단·광복단 등과 통합해 광정단(光正團)을 탄생시켰다. 광정단은 창바이현뿐만 아니라 이들 여러 군단이 구축한 본부 또는 지단들까지 관할하게 되었다. 따라서, 창바이현과 접한 린장(臨江)·푸쑹현까지 광정단 항일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광정단은 창바이현 17도구 동평덕리(東坪德里)에 본부인 총부(摠部)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창바이현에 지방 조직인 남부지부를 설치하였다. 이외에도 린장현에는 서부지부를, 푸쑹현에는 북부지부를 설치하였다. 남부와 북부·서부지부에는 서(署)·구(區) 등의 하부 조직이 만들어져 지방조직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광정단의 남부지부에는 4개의 서가 설치되었는데 18도구 명화동(明化洞)에 소재지를 둔 제1서의 서장(署長)에 임명되었다. 밑으로는 서료경시(署僚警視)·총무(總務)·경시(警視)·재무(財務)·서기(書記)·경호원(警護員) 등의 직책이 있어 서장의 업무를 보필하였다. 지방조직이기는 하지만 독자적으로도 항일운동을 수행할 만큼 상당한 기구를 갖춘 구성체였다. 광정단 지방조직의 책임자로서 1924년 후반까지 활동하였다. 광정단은 같은 남만주(南滿洲)에 근거지를 둔 통의부(統義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성단(義成團) 등 다른 7개 단체와 1924년 11월 24일 통합해 정의부(正義府)를 성립시켰다. 광정단 전 구성원이 참여하여 정의부에서도 일정한 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이 시기 이후 활동 행적에 대해서는 자료를 찾기 어렵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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