曺相連
曺相1886. 10. 28 ~ 1970. 9.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6년 10월 28일 충청남도 대전군(大田郡) 대전면(大田面) 본정2정목(本町二丁目, 현 대전광역시 동구 인동)에서 태어났다. 대전장터(인동장터)에서 상업에 종사하며 어물상(魚物商)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27일의 대전장터 만세운동을 김창규(金昌奎) 등과 함께 주도하였다. 대전지역에서는 상당히 이른 시기인 3월 3일부터 4월 초까지 지속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서울의 민족대표 측과 사전에 어떠한 교감이나 연락도 없이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이었다. 3월 27일 대전장터의 만세운동은 대전에서 발생한 4번째 만세운동이었는데, 서울 휘문의숙(徽文義塾)의 학생이었던 김정철(金正哲)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은 김창규를 비롯한 대전장터의 상인들이었다. 3월 중순경 김정철은 김창규를 만나 “3월 초 이후 전국 각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대전에서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한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당신이 대전 장날을 이용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지 않겠는가?”라고 제안하면서 독립선언서, 『국민회보(國民會報)』, 『독립신문(獨立新聞)』 등 약 300장의 유인물을 김창규에게 건네주었다. 이 만남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에 크게 공감한 김창규는 평소 친분이 있던 상인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조직하겠다고 결의하였다. 김창규는 3월 27일 대전장터의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실행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평소 친분이 있던 상인들을 동지로 규합하고자 했는데, 이때 윤명화(尹明化)·김성현(金聖鉉)·박종호(朴鍾浩) 등과 함께 참여를 권유받았다. 이에 동지들과 김현태(金顯泰)가 운영하는 음식점으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김창규는 김정철로부터 받아 보관하고 있던 「독립선언문」 등의 유인물을 제시하며, “오늘의 장날에 면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자”라고 제안하였다. 모임에 참석한 전원이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만세운동을 결의하였다. 김창규·윤명화·김성현·박종호 등과 함께 오후 3시경 장터로 나갔다. 먼저 김창규가 장터의 한복판에 서서 주민들을 향해 “조선은 현재 독립되어 전국 각처에서 모두 만세를 부르고 있다. 이때 유독 대전만이 빠지고 있음은 큰 치욕이 아니냐”고 연설하여 장터에 나온 주민들부터 매우 큰 호응을 받았다. 김창규가 연설하는 동안 윤명화·김성현·박종호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 등을 주민들에게 배포하며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평소 교류가 있던 장꾼으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김완수(金完洙)를 만나, 그에게 가지고 있던 태극기의 일부를 건네주었다. 김완수와 함께 주민들에게 태극기와 유인물을 배포하며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많은 주민들이 호응하여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는데, 그 규모가 200여 명에 달하였다. 이후 김창규 등과 함께 시위대열을 조직하고, 시위대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장터의 곳곳을 행진하는 등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만세시위의 탄압을 위해 출동한 일제 헌병들에게 만세시위의 주도자로 인정되어 김창규 등과 함께 붙잡혔다. 경찰서로 연행되어 조사받은 후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1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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