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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璟植

趙璟植

1887. 12. 14 ~ 1950.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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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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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咸安)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함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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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7년 12월 14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사촌리(舍村里)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학중(學重)이다. 서산서당(西山書堂)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이 서당은 군북면 지역에 거주하는 민족주의 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한 곳이며,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주요 장소였다. 1919년 3월 20일 군북면에 위치한 군북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함안군의 만세운동은 고종 장례식에 참여하고 돌아온 지역 인사들에 의해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작되었다. 3월 5일 서울에서 돌아온 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3월 19일 함안면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군북면 사촌리 조용대(趙鏞大)의 사랑채에서 조상규(趙相奎)·조형규(趙炯奎)·조주규(趙周奎) 등과 함께 함안면 만세시위 참석을 결정하였고, 이와 별개로 3월 20일 군북면 장날을 이용한 만세시위를 결의하고 거사 계획을 의논하였다. 이후 구체적인 만세시위 계획이 논의되었고, 시위에 필요한 태극기·독립선언서 등 준비물의 제작, 군중 동원을 위한 각 지역별 연락책 구성, 일제 경찰 및 밀정의 동향 감시 등의 역할은 조상규 등에게 분담되었다. 이때 독립선언서 내용을 줄여서 전단 형태로 만들어 대량으로 등사하는 일을 맡았다. 3월 19일 함안면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될 때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제 군경의 진압이 시작되었고, 이튿날 군북면 만세시위를 실행하기 위해서 조상규·조형규 등 군북지역 인사들과 함께 함안면 만세시위에서 빠져나왔다. 3월 20일에는 군북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전날 함안면 시위로 인해 일제 군경의 감시가 심해져 군북면의 시위는 정오부터 시작하려던 계획을 변경해, 오전 9시부터 동촌리(東村里)에 위치한 사립 신창학교(新昌學校) 교정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위는 군북경찰관주재소(郡北警察官駐在所)에 파견되어 있던 진해만 중포병대대 특무조장 다이마 기지로(泰間喜治郞)이하 16명의 일제 군대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러자 만세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계획대로 군북시장으로 이동하여 정오 시위를 준비하였다. 오후 1시부터 만세운동이 거행되자 참여인원은 5,000여 명까지 늘어났고, 이들과 함께 군북면사무소와 주재소로 진격하였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제 군경은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하였다. 이에 시위 군중과 함께 물러서지 않고 주재소를 포위하며 투석전을 감행하여 벽과 유리창 등을 파손하였다. 시위대가 굴하지 않자 일제 군경은 실탄 사격을 개시하였고,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때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6월 27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면서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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