蔡洙般
蔡洙般1900. 8. 7 ~ 1955. 12.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수양동우회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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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900년 8월 7일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 팔원면(八院面) 용산리(龍山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강(平康)이다. 농업에 종사하였고, 과수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만주나 외국으로 이주하는 농민들이 대거 발생하자 일제의 지배정책에 반감을 품고 독립사상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제의 무력에 좌절되는 것을 목격하고 군사력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며, 독립전쟁론에 뜻을 두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였다. 평소 뜻이 같은 청년들과 정기적으로 모여 금서로 지정된 책을 읽으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하지만 이 일로 1920년 11월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는 등 조사를 거쳐 재판에 넘겨졌고, 1921년 2월 6일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22년 가출옥으로 풀려난 후 노기정(魯基禎)의 소개로 이광수(李光秀)를 만나 교류하면서 민족실력양성론을 기반으로 한 애국계몽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흥사단의 국내 조직체인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에 가입하고, 이광수가 저술한 「민족개조론」과 「신생활론」 등을 읽으면서 이를 실생활에 적용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평안남도 용강군(龍崗郡) 지운면(池雲面) 진지동(眞池洞)에 과수원을 사들여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후, 청년구락부를 조직해 지역민들의 문맹 퇴치를 목적으로 야학을 운영하였다. 그러다가 농촌 사업 본위로 조직을 변경하고 단체의 명칭을 혁산구락부(革山俱樂部)로 바꾸었다. 이어서 농촌 경제를 살리기 위해 농사개량 등의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농촌강습회를 개최하여 농민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독립운동을 도모하고 있다고 판단하며 의심하는 일제로부터 노골적인 탄압을 받다가, 결국 1930년 9월 13일 용강경찰서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이후 조사를 받고 같은 해 10월 14일 신의주검사국으로 압송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1932년 4월 13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932년 6월 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3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옥고를 겪었다. 1935년 7월 20일 신의주형무소에서 만기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으로 추서하였다. ⋮조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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