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一亨
鄭一亨1904. 2. 23 ~ 1982. 4. 2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재미유학학생회
- · 수양동우회
- · 흥사단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평양부 만세시위
- · 흥사단 사건
- · 수양동우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904년 2월 23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에서 아버지 정기찬(鄭基贊)과 어머니 하은총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호는 금연(錦淵)이다. 어린 시절 부친을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지만, 주변에서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공부에 재능이 있었고, 신앙심도 깊었다. 1919년 3월 1일 평양(平壤) 광성고등보통학교(光成高等普通學校)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1922년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에 입학한 이후 독립정신 보급과 농촌운동에 힘썼다. 1929년 도미(渡美)한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에는 안창호 특별강연회 개최 사건, 흥사단(興士團) 사건,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 등에 연루되었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1912년 7세에 삼존학교(三存學校)라는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인 학교였던 집성학교(集成學校)를 거쳐 기독교계의 삼숭학교(三崇學校)로 전학해 1917년 졸업하였고, 평양의 광성고등보통학교로 편입하였다. 1919년 2월 광성고등보통학교 2학년 재학 중에 만세시위 계획을 듣고, 학교 기숙사 지하실에서 김재호(金載浩) 등 10여 명과 함께 태극기 5,000여 장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이자 기독교 북감리파 목사인 신홍식(申洪植)의 지도를 받으며 만세시위 참여자들에게 태극기를 배부하며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평양경찰서에 붙잡혔다. 하지만 당시 16세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7일 후 풀려났다. 1919년 8월 25~26일경 예수교 북감리파 신자인 한기동(韓基東)과 정동(貞洞)의 교회에서 만나 8월 29일 국치기념일을 알리기 위해 제작한 인쇄물인 「국치기념호(國恥記念號)」를 배포하기로 한 계획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평양으로의 발송을 부탁하며 인쇄물 20장을 주고, 8월 29일 밤 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가지고 가도록 하였다. 1923년 연희전문학교에서 미국인 교수가 "한국의 여건상 기술·자본·원료 및 시장확보 등이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므로 한국의 독립은 부당하다"라는 발언을 하자, 이창희(李昌熙) 등 5~6명의 학생과 함께 폭행하였다. 1925년에는 연희전문학생 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의 전도강연대(傳道講演隊)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황해도 봉산군(鳳山郡)·서흥군(瑞興郡)·수안군(遂安郡)·신계군(新溪郡)·곡산군(谷山郡) 등으로 강연회를 떠나 독립정신을 보급하고 이를 바탕으로 농촌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29년 미국으로 유학하였다. 이곳에서 재미유학생회(在美留學生會) 조직에 참여해 외교부장으로 선임된 후, 독립정신 고취와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31년 미국 뉴욕대(New York University) 신학부 종교교육과를 졸업하고, 1932년에 쎌레규스 대학에서 엠에이(MA)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뉴저지주 드류대학(Drew University)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여, 1935년 6월 박사학위를 받고 11월 귀국하였다. 1937년 연희전문학교과 감리교신학교(監理敎神學校) 등의 학교에서 강사를 역임하였고, 10월에는 평양의 감리교 기독청년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달 안창호(安昌浩)의 특별강연회를 개최한 것을 빌미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른바 유언비어(流言蜚語) 유포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개월간 구류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흥사단 사건으로 붙잡혔고, 연이어 수양동우회 운동으로 붙잡혀 기소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1940년 일제의 창씨개명에 저항하다가 수차례 구금당하였다. 1942년 1월 이동욱(李東旭)·안흥국(安興國)·한익수(韓益洙)와 함께 국제정세를 논의하면서 일제의 태평양전쟁 패배와 한국의 독립을 언급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 일로 1943년 이른바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같은 해 11월 29일 평양복심법원을 거쳐 1944년 3월 30일 고등법원에서 결국 무죄판결을 받았다. 광복 이후 1945년에는 미군정청 인사행정처장과 물자행정처장을 지냈다. 1947년에는 충청남도도지사로 4개월간 재직하였다. 1950년 제2대부터 1973년 제9대까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1977년 3월 22일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저서로는 『UN과 한국』, 『국제연합독본』, 『유엔의 설립과 업적』, 『오직 한길로』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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