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섭
金光燮1880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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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1880년경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황주면(黃州面) 황강리(黃崗里)에서 태어났다. 천도교인으로 1919년 당시 40세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2일 황해도 황주군 황주면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황주군의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1일 평안남도 중화군(中和郡) 출신의 천도교인 최창룡(崔昌龍)이 황주 읍내로 와서 천도교 황주교구 교구장인 김성준(金聲駿)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서울의 만세 시위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김성준은 황기타(黃己拕) 등과 협의를 통해 황주에서도 황주면의 장날인 3월 2일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독립선언서의 배포는 황기타가 맡기로 하였다. 또한, 벽성리(碧城里)의 조진영(趙鎭永), 성남리(城南里)의 김병식(金炳植), 황강리의 김광섭과 최석길(崔錫吉) 등 황주면의 주요 천도교인들에게 만세 시위 계획을 알리고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였다. 3월 2일 오후 2시경 황주면 성남리 남천(南川) 시장 곳곳에 독립선언서가 나붙었다. 수백 명의 천도교인들이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강형섭(康亨燮)·김병식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대는 등사한 독립선언서를 사람들에게 나눠주었고, 이에 장꾼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시위대의 규모가 커졌다. 시위대는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경찰서 앞으로 행진하였고, 경찰들은 만세 시위를 앞에서 이끌고 있던 강형섭과 김병식 등을 체포하였다. 이에 표정일(表正一) 등과 함께 앞장서서 경찰서 앞에서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시위대는 경찰서의 유리창을 부수고 한국인 경찰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며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기독교 예배당 앞까지 진출한 시위대는 대열을 정돈하면서 일제히 독립 만세를 외쳤고, 만세 시위의 취지를 설명하니 기독교인들도 동참하였다. 규모가 커진 시위대는 계속 독립 만세를 외치며 남천시장을 행진하였다. 이날 시위에는 황주면뿐 아니라 구락면(龜洛面)·구성면(九聖面)·도치면(都峙面)·삼전면(三田面)·송림면(松林面)·인교면(仁橋面)·천주면(天柱面)·청룡면(靑龍面)·청수면(淸水面)·흑교면(黑橋面) 등 황주군의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참여하였다. 만세 시위를 마무리한 천도교인 200여 명은 천도교 황주교구에 회집하여 휴식을 취하였다. 만세 시위에 대해 경찰들은 다른 지역으로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소방조까지 동원하여 탄압하였다. 경찰과 헌병들은 오후 5시경 만세 시위의 주동자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천도교 황주교구실로 진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황주면의 황기타·최석길·조진영, 구락면의 지봉서(池鳳瑞), 구성면의 채보선(蔡寶善), 도치면의 박동일(朴東日), 삼전면의 최하석(崔河錫), 송림면의 김시원(金始圓)·나희풍(羅喜豊), 인교면의 최찬형(崔賛衡), 천주면의 김희걸(金稀杰), 청룡면의 임재창(林在昌), 청수면의 표정일, 흑교면의 권만일(權萬鎰) 등 80여 명과 함께 붙잡혔다. 황주경찰서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후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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