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容在
鄭容在1901 ~ 1920. 8.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2011)
관련 사건
- · 1919년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1)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20년 당시 20세이므로, 1901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한자를 달리한 정용재(鄭龍在)를 썼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안성군 원곡면·양성면(陽城面)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에서는 동향의식이 높았던 두 지역 주민들의 연합으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원곡면과 양성면의 연합 만세운동은 원곡면 칠곡리의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이근수(李根洙), 내가천리(內伽川里)의 이덕순(李德順), 죽백리(竹栢里)의 이양섭(李陽燮) 등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외가천리의 이근수로부터 4월 1일 오후 ‘오늘 밤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받고, 그 취지에 동의하여 참여를 결심하였다. 이날 밤 마을 주민들과 함께 외가천리에 위치한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원곡면의 각 마을에서 약 1,000여 명의 주민들이 면사무소 앞에 집결한 가운데, 주도인물들의 지휘에 따라 면사무소 앞에서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중, 면장 남길우(南吉祐)와 면사무소의 직원들이 아직 면사무소 안에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이들을 밖으로 끌어내 태극기를 쥐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만세시위의 분위기에 압도된 면장 남길우와 직원들이 순순히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만세시위에 대한 열기는 달아올랐다. 크게 고조된 만세시위의 열기를 파악한 이유석·홍창섭 등의 주도자들은 시위대를 향해 양성으로 가자고 외쳤다. 양성면의 동항리(東恒里)는 과거 양성군의 군청 소재지였기 때문에 일제의 경찰주재소, 우편소 및 양성면 면사무소 등 일제의 주요 시설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도자들의 제안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다른 주민들과 함께 횃불을 밝히고, 시위대열을 형성하였다. 선두에 원곡면장 남길우를 앞세우고, 양성면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행진하였다. 원곡면과 양성면을 구분 짓는 성은고개 정상에 시위대가 도착하자, 주도자들은 일단 행진을 멈추고 집회를 개최하였다. 가파른 고개를 오르느라 지친 시위대의 휴식을 취할 겸 양성에서 새로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에 앞서 주민들의 분위기를 재정비하기 위함이었다. 주민들 앞으로 이유석·홍창섭 등이 차례로 나와 일제의 식민통치를 규탄하면서 “독립이 되었으니, 더 이상 면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은 필요 없다, 모두 때려 부숴야 한다”, “양성 읍내에 있는 일본인도 모두 쫓아 버려야 한다”는 등 주민들의 투쟁의지를 일깨우는 내용을 연설하였다. 이들의 연설에 크게 격동되어 다른 주민들과 함께 일제의 시설들을 공격할 돌멩이와 몽둥이 등을 준비하여 다시 시위대열을 정비하고, 양성면을 향해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행진하였다. 양성면에서도 이날 밤 오후 9시경부터 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 수백 명의 주민들이 양성 경찰주재소 앞에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밤늦게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해산하려던 양성면의 주민들은 성은고개 방향에서 양성면으로 다가오는 횃불의 무리를 발견하였다.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양성으로 행진해 오고 있는 원곡면의 시위대였다. 이 모습을 보고 양성면의 주민들은 해산을 중단하고, 원곡면 주민들과 합류하였다. 2,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된 원곡면과 양성면의 연합 시위대는 더욱 사기가 충천하여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지휘에 따라 양성면의 주민들과 함께 가장 먼저 일제 경찰주재소로 행진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주재소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주재소를 공격하라는 최은식의 외침에 호응하여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주재소의 창문 등을 깨뜨렸다. 이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 비치된 집기 등을 파손시키는 동안 다른 주민들은 주재소 건물에 불을 질러 완전히 소실시켰다. 두 번째 공격 목표는 양성우편소였다. 주도자들의 지휘에 따라 시위대와 함께 양성우편소로 행진하여 우편소의 금고를 파손시키고, 다른 집기들을 밖으로 꺼내 모두 태워버렸다. 이후 지역의 주민들에게 평소 원성이 높았던 일본상인 도자토 토요테(外里與手)의 상점과 고리대금업자 다카 히데토모(隆秀知)의 자택을 습격하여 상점과 집안의 기물 및 가구들을 불태워 버렸다. 다음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뒤, 원곡면으로 돌아와 원곡면 면사무소까지 소실시킨 후 해산하였다. 이와 같은 격렬한 만세시위의 다음날인 4월 3일 일제는 조선주차군 제79연대 소속 약 30여 명의 병력을 원곡면과 양성면으로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 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일제의 군대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처분을 받은 당일인 1920년 8월 10일, 그동안의 일제 경찰과 사법당국에 의해 받은 모진 고문과 열악한 구금 환경으로 인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