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鎔交
鄭鎔交1885. 4. 23 ~ 194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남해군 남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5년 4월 23일 경상남도 남해군(南海郡) 남해면(南海面) 북변리(北邊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3~4일 남해군 남해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3월 20일 남해면 읍내 만세시위로 시작된 남해군의 만세운동은 설천면(雪川面)·고현면(古縣面) 등에서 4월 6일까지 최소 5차례 발생하였다. 특히 4월 3일부터 4일에 걸쳐 전개된 남해면 만세시위는 격렬하게 전개되면서 남해군 만세운동의 절정을 이루었다. 남해면 시장 만세시위에서 유찬숙(柳贊淑)·정순조(鄭順祚)·정학순(鄭學淳)·정몽호(鄭夢虎)·윤주순(尹柱舜) 등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고 주도하였다. 남해면 만세시위는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文義里)에 사는 이예모(李禮模)가 인근 하동군(河東郡)에 가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인사들이 제작한 독립선언서를 받아온 것이 계기가 되었고, 뜻을 함께하던 인사들에게 선언서를 보여주면서 시작되었다. 이예모의 집에서 이루어진 회합에 정순조·윤주순 등과 함께 참석하여 거사에 적극 찬성하였다.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 제작과 독립선언서 등사 등을 함께 하였고, 주민 동원을 위한 각 마을별 연락 담당의 역할도 분담하였다. 4월 3일 오후 3시경 설천면 남양리(南陽里)에서 독립선언식이 열렸다. 장대에 높이 단 큰 태극기를 세우고, 이예모가 군중 앞에서 하동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후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해면으로 나갈 때,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시위대와 함께 고현면에 이르렀을 때, 이곳 면장인 김치관(金致寬)이 경찰주재소에 시위 발생 사실을 밀고하는 바람에 일단 주도자들과 협의하여 시위대를 해산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남해면 읍내시장의 장날인 4일에 다시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하였다. 4월 4일 오후 2시경부터 남해면 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주도 인물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읽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불렀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호응하였다. 시위대는 읍내 경찰관 주재소, 남해군청, 우편국, 금융조합 사무실, 공립보통학교 등에 들어가 집기와 기물을 파손하고 유리창을 깨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의 맨 앞에서 적극적으로 주도하였으며, 특히 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서 학생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독려하였다. 군청 안에 들어가서는 뜰을 가득 메운 시위대 앞에서 군수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강요하였고, 농민 수탈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던 금융조합 직원들을 시위의 중심지인 시장으로 데리고 와서 군중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 만세시위가 격렬해지자 사천(泗川)경찰서에서 지원 병력이 도착하였고, 총검을 휘두르면서 폭압적인 진압을 시작하였다. 결국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일제 경찰들의 대대적인 체포 작전으로 붙잡혔다. 1919년 8월 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즉각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9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