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興敎
韓興敎1885. 11. 25 ~ 1967. 8. 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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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85년 11월 25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동래면(東萊面) 복천동(福泉洞, 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산동)에서 공장을 경영하던 한규용(韓奎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다. 호는 동해(東海)·한생(恨生)이며, 이명으로 한진산(韓震山)·한헌산(韓憲山)·한흥(韓興) 등이 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하며 항일가곡극·군가 등을 작곡한 한형석(韓亨錫)이 둘째아들이다. 한학을 배웠고, 동래의 개양학교와 삼락학교(三樂學校, 현 동래고등학교)에서 근대 학문을 공부하였다. 졸업 후 190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의 세이소쿠(正則)중학교 보습과와 야간 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1906년 세이소쿠중학교를 졸업한 후 오카야마(岡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하고, 부산 최초의 서양의사가 되었다. 1911년 10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일본 유학생 출신 중국학생들과 적십자회를 조직하였다. 1912년에는 중국 북벌혁명군 홍십자회(紅十字會) 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항저우(杭州)와 베이징(北京)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의료 활동을 하였다. 1912년 상하이에서 신규식·조성환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여 독립운동가들의 의료를 전담하였다. 1913년 10월 중화민국 육군3등 군의정((軍醫正), 소령)으로 러허(熱河) 형수(衡戍)병원장에 취임하였다. 그 후 베이징의학전문학교의 교수와 베이징 중앙방역처 및 베이징시 전염병 담당의사를 역임하였다. 1916년 3월 귀국하여 1917년 고향에서 대동병원(大同病院)을 개업하였으나 1년 6개월 만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신채호와 중외통신사(中外通信社)·전광신보사(展光新報社)의 창립에 참여하고 러시아·미주·중국 각지에 신문을 발송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24년 7월 21일 원세훈·신숙·박건병 등이 베이징에서 결성한 한교동지회(韓僑同志會)에 참여하여 중국 정부의 협조를 얻어 베이징지역 한인들을 결집시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자 하였다. 1925년 6월 베이징에서 원세훈·송호(宋虎) 등과 선두자사(先頭者社)를 조직하고 기관지 『앞잡이』를 발행하였으며, 한·중 연합운동의 일환으로 「타도 일본」이란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26년 10월 대독립당 조직 북경촉성회(大獨立黨 組織 北京促成會)의 회원으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6월 부친의 별세로 귀국하여 1928년 동래지역에서 대동병원을 운영하였다. 1930년 2월 5일 동래에서 김병규(金秉圭) 등이 지방의 발전 도모를 목적으로 설립한 청년단체 경오구락부(庚午俱樂部)에서 간사로 활동하였다. 1933년에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서 베이징·톈진(天津)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에서 대동병원(大同病院)을 개업하여 항일운동을 지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매일신보』 1941년 8월 25일자에 ‘조선총독부 파견의(派遣醫)’로 만주 류허현(柳河縣)에서 다년간 근무하다가 1939년 8월 태평의원을 개업하였고, 1941년 당시 다케오 쇼이치(竹生昌一)라는 이름으로 태평의원(太平醫院)을 운영 중이라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총독부 파견의를 지냈고, 창씨개명한 사실이 확인된다. 1946년 5월 귀국하여 경상남도 도립마산병원 병원장으로 근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강영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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