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贊中
黃贊中1853 ~ 1909. 10. 3
관련 단체
- · 황찬중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2003)
관련 사건
- · 후기의병(황찬중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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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03) 기록에 따르면 1853년생으로 추정된다. 자료의 한계로 출신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09년부터 소규모 의병부대를 이끌고 전라남도 영암군(靈巖郡) 일대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영암군 일대는 월출산(月出山)를 끼고 주변 서남해 도서지역에 인접해 있어 산악과 해상에서 동시에 유격활동을 펼치기에 유리하였다. 1897년부터 인근 목포항(木浦港)이 개항되면서 개항장을 통한 미면교역(米綿交易)은 호남 지역의 쌀을 일본으로 유출시켜 곡식 가격이 올라갔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공산품에 전통 수공업과 목화 재배 등이 큰 타격을 입었다. 더욱이 일본인 상인·농민 등의 진입과 정착은 민족적 이질감을 고취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한 외교권 박탈,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인한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은 국권 상실에 대한 위기감을 고조시켜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이 전개되었다. 호남에서도 전남 광주(光州)를 중심으로 양진여(梁振汝)·조경환(曺京煥), 능주(綾州)에서 양회일(梁會一)·임창모(林昌模) 등이 의병을 일으켜 영암군을 포함한 전남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영암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09년 9~10월경 일제가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하면서 호남 지역의 많은 의병부대가 궤멸되는 가운데서도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분투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3일 영암군 동북방 약 25리 지점인 봉덕(鳳德, 현 영암군 금정면 봉덕리 일대)에서 일본군 보병 제2연대의 후지무라 마쓰키치(藤村增吉) 군조(軍曹)가 이끄는 일본군 부대와 교전하다가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구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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