曺士允
曺士允1878. 5. 8 ~ 1931. 1. 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김태원
- · 양상기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2015)
관련 사건
- · 정미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5) 1878년 5월 8일 전라남도 창평군(昌平郡, 현 담양군) 북면(北面) 동산촌(東山村)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이명은 조성신(曺聖信)·조참봉(曺參奉)이다. 사족(士族) 출신으로, 김태원(金泰元) 의병부대와 양상기(梁相基)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일제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이어서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에 이것을 거부한 해산 군인을 중심으로 의병들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907년 7월 거의하여 활동하던 김태원 의병장은 전남 지역 대표 의병부대인 기삼연(奇三衍) 의병부대에 합세하였고, 같은 해 9월 9일 전라북도 고창(高敞)의 일본군 수비대를 격퇴하였다. 이후 의병부대의 규모를 확장하기 위해 김태원은 기삼연과 영역을 달리하여, 그해 10월 4일 신덕순(申德淳)과 정읍(井邑) 내장사에서 만나서 창의하여 합세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기습으로 연합의병부대는 일시 와해되었고, 1907년 12월 김태원은 기삼연과 다시 연합하여 전남 영광(靈光) 법성포(法聖浦)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이 작전 이후 기삼연은 전남 장성(長城)으로 돌아갔고, 김태원은 동생인 김율(金聿) 의병부대가 일본군 공격으로 붕괴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전남 동복(同福)과 창평으로 의병부대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 김태원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음)1월 1일 김태원 의병부대는 전남 담양(潭陽) 무동촌 전투에서 일본군 광주수비대를 격파하였고, 장성 토천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리는 등 호남의병의 주축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2월 기삼연 의병장이 사망하자,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호남의소(湖南義所)로 재편하여 지속적인 항전 의지를 밝히기도 하였다. 같은 해 4월 김태원 의병장이 일본군에 의해 사망한 뒤 의병부대가 와해되자, 1908년 4월 거의한 양상기 의병부대에 투신하여 의병활동을 이어갔다. 양상기 의병부대는 1909년 2월 9일 30명의 병력으로 담양 우산면(牛山面) 신기촌(新基村) 거주 안판구(安判九)로부터 군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같은 날 다른 일부는 창평 지곡리(芝谷里) 거주 김모(金某)를 비롯한 동민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2월 26일에는 동복 외남면(外南面) 동천리(東川里)에서 다시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같은 달 담양 군서기 한응길(韓應吉)을 체포하고 군자금을 제공하게 하였다. 이후 계속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1909년 4월 담양 정면(貞面) 덕곡리(德谷里)에서 의병부대가 일본군에게 패전하고 와해되었다. 동지 차식연(車植緣)과 함께 창평 북면(北面)에 사는 친형 조덕삼(曺德三)의 집에 은신하였다. 1909년 11월 5일 이를 탐지한 일제 경찰에 의해 차식연과 함께 붙잡혔다. 1910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동죄와 강도죄로 징역 15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12년에 징역 7년 1월, 1914년에 징역 5년 6월 24일로 감형되어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배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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