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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팔

金京八

1873. 3. 2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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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경팔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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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영흥(永興)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영흥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7)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7) 1873년 3월 2일 함경남도 영흥군(永興郡) 횡천면(橫川面) 덕평리(德坪里)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당시 고향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19년 2월 28일 저녁 서울에서 보성사(普成社) 사장 이종일(李鍾一)로부터 지시를 받은 천도교인 안상덕(安商悳)이 천도교 영흥교구에 와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면서 영흥군의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천도교 영흥교구 교구장 김용환(金龍煥)은 영흥 지역 천도교의 주요 인물들과 논의하여 영흥면 남산리(南山里) 장터에서 3월 5일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남산리의 만세 시위는 일본 경찰의 경계가 강화되어 원활하게 전개되지 못하다가 3월 10일과 16일, 17일에 각각 전개되었다. 3월 17일 남산리 장터에 갔다가 만세 시위를 목격하고 온 횡천면 천흥리(泉興里)의 천도교도 김영두(金榮斗)가 찾아와 횡천면에서도 만세 시위를 전개하자는 제안을 하자 적극 동의하였다. 두 사람은 3월 23일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23일 오후 3시 경 김영두와 함께 대평리(大坪里)에 있는 사립 동흥학교(東興學校)를 방문하였다. 교사 김상민(金相敏)을 만난 두 사람은 그날 밤 7시에 전개할 만세 시위에 사립 동흥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어 김영두와 함께 면사무소로 가서 면서기 임승후(林昇垕)를 만났고, 대평리 시장에서는 한철호(韓喆浩)와 만나 그날 밤 예정된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김영두와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7일 함흥지방법원 영흥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를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4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동일한 판결을 받았다. 다시 자신들이 만세 운동을 벌인 것이 한국 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기초한 의사를 발동한 것으로 범죄가 아닌데 1심과 2심에서 부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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