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昌龍
趙昌龍1899 ~ 1923. 6. 1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광복군(만주)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5) 평안남도 순천군(順川郡) 용화면(龍化面) 숭덕리(崇德里) 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1899년생으로 추정된다. 재만 독립군단인 광복군(光復軍)에 가입하여 국내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광복군은 1919년 하반기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평안북도독판부(平安北道督辦府)·대한청년단연합회 등의 단체들이 보다 효율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통합하여 성립한 단체이다. 성립 후 본부를 서간도 콴뎬현(寬甸縣)에 두었으며, 이듬해 2월 김승학(金承學)·안병찬(安炳瓚)·이탁(李鐸) 등 간부들이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 광복군 성립을 보고하고 그 직속이 되었다. 산하에 참리부(參理部)·사령부(司令部)·군영(軍營)을 설치하고, 특수부대인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을 편성하였다. 직속 군사기관인 군영이 있었지만 광복군총영이 편성되면서, 광복군의 실질적인 항일무장활동은 거의 총영의 이름으로 수행되었다. 1919년 말 서간도에서 온 김진준(金鎭俊)·장필석(張弼錫)을 만나 함께 활동하면서 광복군 대원이 되었다. 1920년 1월 1일 김진준과 장필석·한국언(韓國彦) 등과 함께 평남 성천군에 사는 정현조(鄭炫祚)를 찾아갔다. 정현조는 악질적인 일제의 밀정으로, 많은 독립군을 일제의 군경(軍警)에 밀고해 목숨을 잃게 한 자였다. 정현조 집을 찾아갔으나 출타하고 없었다. 이에 정현조의 집을 방화해 밀정 정현조는 물론이고 마을사람 모두에게 친일을 하면 이와 같은 징벌을 받는다는 경고의 증표를 보여주었다. 1921년 1월 또다시 김진준과 한국언 등이 파견되어 찾아왔다. 이들과 함께 1월 12일 성천군 통선면(通仙面)으로 가 그곳의 친일면장 김관종(金觀鍾)과 금융조합 이사인 일본인일본인 나가시게(永重英吉)를 체포하였다. 그들의 죄를 물어 먼저 나가시게를 향해 총을 발사해 처단하였다. 이어 김관종을 처단하려 하자 그가 필사적으로 몸을 피해 도망쳐서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1921년 광복군의 국내 거점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광복군과 그 소속인 총영은 서울에 국내 거점의 총본부를 설치하고, 각 도(道)와 군(郡)에 도영 및 군영을 만들며, 대원들을 장기간 주둔시킬만한 요새를 찾아 별영(別營)을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그해 1월 20일경부터 김진준·한국언 두 대원과 함께 평남 순천군·성천군, 황해도 신계군 등을 다니며 군영의 거점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였다. 1921년 11월에는 이영달(李永達) · 이막령(李幕泠)과 함께 평남 강계군과 황해도 신계군을 다니며 활동하였다. 11월 24일 신계군 고면(古面) 화개리(華蓋里)에 있는 동지 박용기(朴庸基)의 집에 두 대원과 함께 머물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국인 순사 이희춘(李熙春)이란 자가 기습 공격하였다. 상당한 시간의 교전을 벌인 끝에 이희춘의 옆구리와 팔을 명중시켜 중상을 입히고 빠져나왔다. 이후 일제 경찰들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가며 해를 넘긴 1922년 1월 초 신계면 향교리(鄕校里)에 있는 동지 이만협(李萬協)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대원 이영달이 배신해 신계경찰서에 밀고하여 1월 3일 모두 붙잡혔다. 1922년 11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방화 살인죄, 살인미수죄, 공무집행방해죄, 총포화약류취체령 및 동령 시행규칙 위반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23년 3월 1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5월 10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1923년 6월 11일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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