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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敬俊

黃敬俊

1883. 6. 5 ~ 1940.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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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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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용인(龍仁)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용인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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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2)

관련 사건

  • · 1919년 용인군 원삼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2) 1883년 6월 5일 경기도 용인군(龍仁郡) 원삼면(遠三面) 좌항리(左恒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21일 원산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원삼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3월 15일 좌항리의 김성남(金性男)·김영달(金永達)과 인근 사암리(沙岩里)의 최상근(崔相根)·김은수(金殷秀)·안명옥(安明玉)과 맹리(孟里)의 이용환(李容煥)·이인하(李寅夏)·이은표(李殷杓) 등을 방문해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하였다. 그리고 김성남 등과 함께 3월 21일 새벽에 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 방면으로 행진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마을 주민들에게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였고, 태극기와 횃불 등을 준비하였다. 3월 21일 새벽 3시 예정대로 만세를 부르며 고당리(高塘里)에 위치한 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이때 일제 헌병의 탄압을 피해 산봉우리를 이동하며 만세를 불렀고, 면사무소에 도착한 후에는 3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석양이 질 무렵까지 독립만세를 외쳤다. 밤 10시경 외사리로 돌아가던 중 비두리 고개에서 마주친 일제 헌병들의 총격에 맞아 시위대 가운데 2명이 사망하였다. 당일 무사히 피신하였지만 결국 일제 헌병의 수색과정에게 붙잡혀 용인헌병대로 압송되었고, 검사국으로 송치될 때까지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1919년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미결구류일수 중 30일 본형 산입)되었다. 다시 ‘자기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기초하는 의사발동이며 범죄가 아니’라며 상고하였지만, 9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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