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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榮圭

韓榮圭

1882. 9. 7 ~ 1954.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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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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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용인(龍仁)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용인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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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용인군 내사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2년 9월 7일 경기도 용인군(龍仁郡) 내사면(內四面) 남곡리(南谷里)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때부터 천주교(天主敎)를 믿는 독실한 집안이었다. 원래는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부친 한윤근 때 관헌의 탄압을 피해 남곡리로 이주하였다. 1911년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한기근(韓基根) 신부가 삼촌이다. 어렸을 때 양지향교(陽智鄕校)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 세례를 받았으며, 이후 남곡리 천주교 교구장으로 활동하였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자 이에 호응하여 고향에서 마을 주민을 모아서 이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같은 천주교도로 옆집에 거주하는 김운식(金云植)과 함께 3월 29일 내사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직접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3월 29일 내사면 남곡리 밤나물골에서 만세시위를 위해 주민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김운식을 비롯한 100여 명의 마을 주민들과 함께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앞세우고, 내사면 양지리(陽智里)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일제 경찰은 황급히 양지리로 출동하여 무력으로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때 김운식과 함께 시위 주도자로 붙잡혔다. 1919년 5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해 7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조선민족으로서 정의(正義)·인도(人道)에 근거하여 의사를 발동한 것으로 범죄가 아니”라는 취지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8월 21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으며, 1920년 4월 28일 사면으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노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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