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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仁寬

崔仁寬

1876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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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崔仁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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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성천(成川)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성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8)

관련 사건

  • · 성천읍 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8)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사가면(四佳面) 지석리(支石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당시 44세이므로 1876년생으로 추정된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4일 성천군 읍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성천군 만세운동은 비교적 초창기부터 준비되었다. 천도교(天道敎) 성천교구장(成川敎區長) 이돈하(李燉夏)는 1919년 2월 말 평양에 갔다가 손병희(孫秉熙)를 중심으로 한 민족대표 33인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였다. 이에 2월 28일 밤 기차로 성천에 돌아온 이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돈하는 3월 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성천군 각지에 사람을 보내 천도교도(天道敎徒)를 동원하도록 하였다. 사가면에는 석이원(石履元)이 파견되어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였는데, 이때 만세운동의 소식을 접하고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4일 오전 10시 천도교도 수백 명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한편, 일련의 사람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의 행진이 시작되자 함께 시위에 동참하였다. 곧이어 1,0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읍내에 있는 일제 통치 기관인 헌병분대를 습격하였다. 헌병분대에 들어간 사람들은 집기와 유리창을 부수고, 헌병분대장을 구타하여 사망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헌병이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였고, 이로 인해 60여 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400여 명이 붙잡혔다. 이때 일제 헌병에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평양지방법원에서 헌병분대에 침입한 사실이 인정되어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인도(人道)를 다하고 또 국가에 은혜로 보답하기 위하여 조선독립만세를 불렀을 뿐”이라며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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