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恩喜
崔恩喜1904. 11. 21 ~ 1984. 8. 1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근우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2)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2) 1904년 11월 21일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은천면(銀川面) 연남리(蓮南里)에서 최병규와 서덕경 사이의 5남 5녀 중 5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탐진(耽津)이고, 호는 추계(秋溪)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해주의 의정여자학교를 다녔다. 의정여자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유학에 앞서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입학하였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교사 박희도가 이끄는 비밀 서클 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열린 만세시위에 참여하다가 일제 헌병대에 의해서 붙잡히기도 하였다. 이후 고향인 은천면 연남리로 돌아온 후, 은천면 연남리와 연동리(蓮東里)를 아우르는 배천(白川)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사립창동학교 교사 송흥국(洪興國)과 이정식(李廷植), 물산조합 서기 오예제(吳禮濟), 곡물검사원 조기복(趙起福)에게 서울에서 몰래 가져온 「동포(同胞)여 일어서자」는 격문 등을 전달하는 한편, 송흥국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사용할 격문과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만세시위 계획 및 태극기 제작에는 잡화상 조면식(趙冕植)·염천태(廉天太)·이완구(李玩求),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인 조두섭(趙斗燮)과 유재현(劉在賢), 인천상업학교에 다니던 유택선(劉澤瑄)이 함께 하였다. 이를 통해 연남리와 연동리의 개신교계 청년 및 학생들과 함께 배천 장터가 열리는 3월 30일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30일 정오 무렵 배천 읍내에서 개신교인과 청년, 학생이 주도하는 만세시위가 열렸다. 약 2,000명이 모인 시위대와 함께 일제 관헌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독립만세를 외치자, 배천헌병분견소 소속 헌병들이 위협 사격을 가하면서 강압적으로 시위대 해산을 추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 헌병에 배천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붙잡혔다. 1919년 5월 24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1920년 9월 황해도 안주(安州)에 위치한 유신여학교(維新女學校)에서 교사를 역임하였으며, 이후 일본 도쿄(東京)의 니혼여자대학(日本女子大学)에 입학하였다. 3학년에 재학 중인 1924년 10월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일보』 본사의 학계부 기자가 되었다. 이는 민간신문사 중에서 최초로 여성이 기자가 된 사례였다. 1927년 5월 27일 조선일보 기자 신분으로 근우회(槿友會) 창립총회에서 초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근우회가 해체되는 1931년까지 선전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조선 여성의 지위 향상을 추구하였다. 한편 『조선일보』 기자로서 1930년 7월 학예부장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나, 1932년 조선일보 기자 생활을 그만두었다. 1948년 대한부인회 서울시부회장, 대한여자국민당 서울시당수(1962), 한글학회 지도지원(1971), 3·1국민회의 대표위원(1971~1973), 여성신문사 고문 등을 역임하였으며, 1969년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를 받기도 하였다. 저작으로 『씨뿌리는 여인』(1957), 『근역의 방향』(1961), 『조국을 찾기까지』(1973), 『여성전진 70년』(1980)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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