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秀香
崔秀香1903. 1. 27 ~ 1984. 7.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광주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03년 1월 27일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 효천면(孝泉面) 양림리(楊林里)에서 아버지 최명환과 어머니 이군분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명은 최현숙(崔賢淑)이다. 부모는 모두 불교이지만, 종교에 개방적인 가풍으로 기독교계 학교를 다니며 공부하였다. 1919년 당시 광주의 수피아여학교(須皮亞女學校)에 재학하고 있었고, 3월 10일 전남 광주군 광주 읍내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날의 만세운동은 김철(金鐵)·남궁혁(南宮爀) 등의 주도로 진행되었는데, 이때 계획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수피아여학교의 교사 박애순(朴愛順)도 포함되어 있었다. 3월 초부터 수업 시간에 박애순에게 민족자결주의를 비롯하여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이 결정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독립을 꿈꾸고 있었다. 박애순이 구체적인 만세 계획이 행해지고 있다며 이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자, 함께 할 것을 결심하였다. 예정된 거사 전날이던 3월 9일 저녁에는 숭일학교 교사 최병준(崔丙浚)이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을 양림리 기념각에 모아 놓고 ‘그리스도가 온몸을 희생하여 자유를 위해 힘썼듯이 우리도 어떠한 장해라도 배제하고 그 목적을 관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2시 30분, 광주 부동교(不動橋) 밑 작은 장터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과 진신애(陳信愛)를 필두로 하여 학생 박우말례(朴又末禮)·홍순남(洪順南)·최경애(崔敬愛)·양순희(梁順喜) 등과 함께 직접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들고 장터로 향하였다. 사람들이 숨겨둔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등을 서로 나누어 돌려보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사람들에게 배포하였고, 이후 시위대와 함께 시내 곳곳을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서문통(西門通)과 본정통(本町通)을 거치며 시내의 중심을 가로질렀으며, 북문(北門)에 도달하여서는 다른 방향에서 온 시위대와 합류하여 1,0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후 방향을 바꾸어 오후 5시경 우체국 앞에 이르렀는데, 출동한 일제 기마헌병대 및 소방대, 퇴역 군인 등이 총칼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때 박애순·진신애와 함께 가장 먼저 일제 헌병에게 붙잡혔다. 이 날 붙잡힌 사람들 중 가장 어린 나이였으며, 그럼에도 일제 헌병의 조사과정에서 목봉으로 머리를 심하게 맞아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이후 최현숙으로 개명하였다. 1920년부터 1924년에는 서울로 유학,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광주로 돌아와 수피아여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였으며, 1924년 8월 결혼 이후에는 남편 김용환(金容煥)과 함께 동아일보 광주지국 총무 겸 기자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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