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世權
崔世權1901. 8. 19 ~ 1939. 2. 2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8)
관련 사건
- · 1919년 창원군 천가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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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8) 1901년 8월 19일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천가면(天加面) 동선리(東仙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11일 창원군 천가면 가덕도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창원군의 만세운동은 8차례의 시위와 3차례의 시위 계획이 있었다. 3월 23일 창원군 최초로 창원면 읍내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는 5,000여 명이 참여하였다. 이후 창원군에서는 만세시위 열기가 4월 말까지 장기간 지속되었다. 가덕도 만세시위는 3월 하순부터 시작된 창원 군내 각지 시위 소식이 전해진 것과 3월 말경 상경했던 지역 유지 양흥석(梁興錫)이 서울 만세운동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은밀히 가지고 돌아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양흥석은 지역의 민족주의 인사들과 만나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가덕도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김동원(金東洹)·이상운(李相云)·조용진(趙鏞晉) 등과 함께 참여하여 거사일을 4월 11일로 정하였고, 가덕도 동쪽 동선리 가덕진(加德鎭)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만세시위를 위해 우선 김동원 등 주도자들과 분담하여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 수십 개를 제작하였고, 주민 동원을 위한 섬내 각 마을별 연락도 은밀히 수행하였다. 거사일인 4월 11일 주도자들과 같이 가덕진에서 오후 3시경부터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사전 연락 등으로 모인 약 300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군중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섬내 마을을 행진하였다.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일제 헌병대 병사 10여 명이 총검을 휴대하고 출동하였다. 경찰이 아닌 헌병이 시위 진압을 위해 먼저 출동한 것은 가덕진을 중심으로 한 동선리 지역이 일본군 헌병대 관할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무장한 일본군의 해산 작전에 만세 시위대는 결국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밤에 다시 모여 만세시위를 재개하였다. 오후 8시 30분경부터 시작한 두 번째 시위에도 약 150명의 주민들이 모였고, 주민들을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동선리 마을을 행진하였다. 다시 일제 헌병대가 출동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진압하고, 주도자 검거에도 나섰다. 주도자 10여 명이 붙잡힐 때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 함께 붙잡혔다. 1919년 5월 26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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