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泰侖
鄭泰侖1888. 3. 30 ~ 1923. 6. 2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3)
관련 사건
- · 1919년 산청군 신등면
- · 단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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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3) 1888년 3월 30일 경상남도 산청군(山淸郡) 도산면(都山面) 장죽리(長竹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한 정태륜(鄭泰倫)을 썼다. 1919년 3월 20~21일 산청군 신등면(新等面)과 단성면(丹城面)에서 거행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9일부터 시작된 산청군 만세운동은 총 6차례 발생하였다. 고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지역에서 명망이 높았던 유림 김영숙(金永淑)의 아들 김상준(金相峻)이 윤규현(尹圭鉉)과 함께 상경하여 서울 만세운동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왔고,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18일 준비모임에 적극 참여하여 김영숙 등과 함께 3월 20일 신등면 단계리(丹溪里)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군민들이 만세시위에 참가하도록 독려하는 격문을 직접 쓰고, 야음을 틈타 도산면·신등면 등 인근 지역에 부착하였다. 또한 거사에 사용할 ‘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도 만들었다. 3월 20일 김영숙·김상호(金相浩)·권숙린(權肅麟) 등과 함께 단계리 시장으로 가서 오후 2시경부터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선두에서 일제 식민지배의 학정을 규탄하고, 만세시위를 계속해야 하는 당위성을 설파하는 연설을 통해 군중들을 격려하였다. 직접 제작한 큰 기를 앞세우고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시위대를 이끌고 시장을 행진하고, 이어서 단성면 성내리(城內里)로 나아갔다. 만세시위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군 헌병대가 진압을 위해 출동하였다. 거창의 일본군 헌병분견대와 진주의 일본군 수비대도 합세하였다. 일본군은 총검을 휘두르며 야만적이고 폭압적으로 강제 해산을 시도하였고, 그 과정에서 36명이 만세시위 주도 혐의로 붙잡혔다. 이때 붙잡히지 않고 김영숙 등 다른 주도자들과 함께 다음날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를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21일 오후 1시경부터 단성면 성내리 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재개되었다. 전날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시위대는 2배 가까이 늘어난 약 1,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일본군의 폭력적 진압에 대한 분노로 시위대는 훨씬 더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일부 시위대는 곤봉 등의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헌병주재소로 나아갔다. 그리고 시위대를 대표하여 김영숙과 함께 전날 일본군 헌병대가 연행하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를 무시한 일제 헌병에게 붙잡혀 구금되었다. 이 일로 1919년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해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부산감옥 진주분감으로 불린 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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