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致文
鄭致文1891. 1. 18 ~ 1959. 7. 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안동군 예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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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1년 1월 18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녹전면(祿轉面) 신평동(新坪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919년 3월 17일 안동군 예안면(禮安面) 읍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예안면 만세시위는 세 계열에서 계획되었다.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을 중심으로 이광호(李洸鎬)·이중원(李中元)·이남호(李南鎬)·이시교(李時敎)·신응두(申應斗)·신동희(申東熙), 안동군 유림인 조수인(趙修仁)·이원영(李源永), 예안 만촌교회의 신응한(申應漢)·민태규(閔泰圭) 등이 각각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거사를 준비하였다. 예안면장 신상면 등이 만세운동을 계획한 후 함께 할 사람들을 모을 때 동참하였다. 3월 17일 비밀리에 예안면 읍내 장터로 이동하였다. 오후 3시 30분경 예안면사무소 뒤편 선성산(宣城山)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일제가 세운 대전기념비(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린 후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신호로 선두에 선 주도자들을 따라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 중앙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유림과 기독교인 등을 포함하여 장터에 있던 사람들이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만세시위의 열기가 높아졌다. 예안경찰관주재소 일제 경찰들이 안동으로부터 지원받은 병력과 함께 시위대를 저지하면서 선두에서 지휘하던 이동봉(李東鳳) 등 20여 명을 체포해 연행하였다. 잠시 해산했던 시위대는 장터를 떠나지 않고 이후의 만세시위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리고 체포된 주도자들을 구출해야 한다고 결의한 시위대는 주재소로 이동해 다시 만세시위를 재개하였다. 이시교·안병극(安炳極)·조수인 등이 1,5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구속자 석방을 외쳤다. 시위대와 함께 총칼로 위협하는 일제 군경을 제치고 투석전을 벌이며 내부로 들어갔고, 돌과 기왓장 등으로 유리창과 문을 부수는 등 격렬하게 항거하였다. 다시 일제 군경이 시위대를 향하여 총격을 가하며 무력으로 진압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조수인·이맹호 등이 부상을 당하였고, 수십 명과 함께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3월 24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였고, 같은 해 4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었지만 다시 징역 1년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해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0년 영친왕(英親王) 결혼 기념 특면사면으로 4월 27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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