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宜鎔
鄭宜鎔1888. 2. 13 ~ 1956. 4.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8)
관련 사건
- · 주교리(舟橋里) 장터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8) 1888년 2월 13일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 고전면(古田面) 성천리(城川里)에서 태어났다. 자는 상견(尙見), 이명은 정홍기(鄭弘基)이다. 일제 말기에는 우하라 기요우(宇原宜鎔)라는 창씨명을 사용하였다. 1919년 4월 6일 박영묵(朴永黙)·이종의(李宗義)·정상정(鄭相正) 등과 함께 하동군 고전면 주교리(舟橋里) 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하동군 고전면 만세운동은 성천리 지소(紙所) 마을의 박영묵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박영묵은 1919년 3월 1일 이래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고 있음을 파악하고,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이전부터 독립에 대해 같은 생각으로 교류하고 있던 박영묵에게서 만세운동에 대한 의견을 듣고, 이종의·정상정 등과 함께 박영묵의 의견에 찬성하여 만세운동의 동지로 결합하였다. 그리고 박영묵·이종의·정상정과 논의를 통해 뜻을 함께하는 더욱 많은 동지들의 규합을 위해 노력하여 주변의 지인들을 모아 모두 33인으로 구성된 일신단(一身團)을 조직하였다. 일신단 동지들과 논의하여 주교리 장터의 장날인 4월 6일을 만세운동의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만세시위 당일에 낭독할 독립선언서를 구하기 위해 일신단은 정재기(鄭在基)를 하동 읍내리(邑內里)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정재기는 읍내로 가는 도중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로 인하여 진교리(辰橋面)의 경찰주재소는 고하리(古河里)와 주교리의 장터에 삼엄한 비상경계를 펴고 장날의 만세시위에 대비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박영묵 등의 동지들과 함께 거사일을 변경하지 않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거사일인 4월 6일 오후 1시 40분경 주교리 장터에 1,000여 명의 주민들이 모였다. 이를 만세운동의 적기로 보아 박영묵은 큰 태극기를 들고 장터의 한복판에서 주민들 앞으로 나와 간단하게 만세시위의 취지를 호소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였다. 이를 신호로 이종의·정상정 등 30여 명의 일신단 동지들과 함께 일제히 품 속의 태극기를 꺼내 높이 흔들면서 박영묵의 ‘대한독립만세’ 삼창에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본 장터의 많은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일제 군경은 즉시 출동하여 만세시위를 저지하였다. 이에 일신단 동지들과 함께 달려들어 총검을 탈취하고 모자와 제복까지 벗겨 일제 경찰과 헌병들을 무장해제시켰고, 주민들은 이들을 구타하여 일제 헌병 2명과 경찰 1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지원병력으로 급파된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이날의 만세시위는 강제 해산되었다. 다음날 만세시위의 주도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성천리로 파견된 일제 군경에게 다른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1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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