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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尙奎

黃尙奎

1891. 4. 19 ~ 1931.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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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黃尙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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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密陽)중국방면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밀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일합사
  • · 광복단
  • · 대한광복회
  • · 대한독립의군부
  • · 조선독립군정사
  • · 대한(북로)군정서
  • · 의열단
  • · 밀양청년회
  • · 신간회(밀양지회 및 본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밀양폭탄사건
  • · 광주학생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91년 4월 19일 경상도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노하동(路下洞, 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에서 빈농 황문옥(黃文玉)과 허경순(許敬順)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호는 백민(白民), 별명은 관운장(關雲長), 이명은 허택(許鐸)·허옥(許鈺) 등이다. 1906년 밀양향교에서 설립한 진성학교(進成學校)를 다녔고, 1908년 개교한 동화학교(同化學校)에서도 수학하였다. 1909년 10월 밀양 읍내 밀흥야학교(密興夜學校)의 체조 담당 명예교수가 되었다. 그 후 밀양군 상동면(上東面)의 고명학교(高明學校) 역사교사가 되었다가, 1910년부터 동화학교 교사로 1년간 재직하였다. 1908년 김원봉(金元鳳)의 고모인 김시악(金時岳)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1913년경 밀양에서 김대지(金大地)·구영필(具榮珌) 등과 함께 친목단체로 위장한 항일결사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고, 경상북도 칠곡(漆谷) 출신의 이수택(李壽澤), 경상남도 마산(馬山)의 안확(安廓)·명도석(明道奭) 등을 규합하여 활동하였다. 1913년 말 경북 풍기(豊基)에 본거를 둔 광복단(光復團)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1915년 대구에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가 결성되자 합류하였다. 광복회 조직이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고 노출되어 1918년 1월부터 주축인물 다수가 붙잡혔으며, 그해 2월 일합사 조직과 그 독립운동계획안이 구영필·김대지의 체포와 더불어 일제 경찰에 발각되자 급히 만주 지린(吉林)으로 탈출하여 망명하였다. 1919년 2월 지린에서 여준(呂準)·조소앙(趙素昻)·김좌진(金佐鎭) 등 여러 독립지사와 함께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결성하여 재무를 담당하였다. 같은 해 4월 의군부가 조선독립군정사(朝鮮獨立軍政司, 길림군정사)로 개편될 때 재무국 회계과장이 되었다. 그 사이 지린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의 연기명 선언자 39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선언서 말미에 주창된 ‘육탄혈전’의 방책으로 청년결사대를 조직하여 일제 통치기관과 그 요인들을 타격·섬멸할 것을 구상하고 구체적 방안을 동지들과 숙의하였다. 처조카 김원봉이 1919년 3월 난징(南京)에서 지린으로 오니, 류허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로 보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하도록 하였다. 거기서 김원봉이 동지로 규합하여 지린으로 동행해 온 여러 명의 생도 및 졸업생과 국내 만세운동 참여한 후 지린으로 와 있던 청년지사 몇몇을 합류시켜 지린성 파호문(巴虎門) 밖의 한 중국인 집에서 합숙하며 폭탄 제조법과 사용법을 익히도록 하였다. 그해 11월 10일 이들 10명의 청년이 의열단(義烈團)을 창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창단 회합에서 조직의 대표자인 ‘의백’(義伯)으로 추대되었으나 고사하고 김원봉이 단장으로 선출되게끔 하였다. 이후 김원봉의 고문 겸 후견인 역할을 자담하였다. 앞서 그해 10월 북만주의 대종교계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군정회(大韓獨立軍政會)와 길림군정사의 제휴로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가 성립하고, 같은 해 12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북로군정서)로 개명하자, 그 길림분서(吉林分署, 길림군정서)의 재무부장이 되어 군자금 조달 활동에 주력하였다. 의열단은 조선총독 통치하의 일본인 고관과 한국인 민족반역자 부류, 식민지 지배의 정치기관·선전기관·폭압기구·수탈기구 및 부속 시설물을 겨냥한 고강도의 ‘암살 파괴 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제1차로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경기도경찰부 등 주요 기관 투탄 폭파와 그 수뇌부 암살의 특공 거사를 감행키로 결의하고, 이 계획의 추진과 실행에 창립 단원 전원이 참여키로 하였다. 1920년 3월 김원봉·이성우(李成宇)·곽재기(郭在驥)가 상하이(上海)에서 재료를 구입하여 조립한 폭탄 3개를 안둥현(安東縣)을 거쳐 국내로 밀송하여 밀양 김병환(金鉼煥)의 미곡상점에 은닉시켜졌다. 이 거사 계획에 동참하기 위해 1920년 3월경 윤세주(尹世冑)와 함께 안둥으로 가서 부단장 곽재기 및 단원 이성우·김기득(金奇得)·이낙준(李洛俊)과 함께 폭탄이송 방법과 국내 상황 조사 및 자금조달에 대하여 의논하고, 서울로 잠입해 수창정(需昌町, 현 종로구 내수동)에 단독거처를 정하고 은신 대기하면서 곽재기 등 여러 동지와 수차 밀회 협의하였다. 5월 중순에 2차로 국내 밀반입되어 경남 창원군 진영(進永) 부근에 숨겨져 있던 폭탄 13개와 권총 2정, 탄환 100발 등 무기의 서울 이송을 그 보관책임자인 이수택이 여러 이유를 대면서 계속 미루었다. 그러자 조속 결행하라는 김원봉의 명령을 전달하려고 서울로 들어온 이낙준을 곽재기와 함께 만나서 상의하고, 김기득을 부산의 이수택에게 독촉 차 보냈다. 그러나 의열단의 국내거사 계획과 밀입국 단원들의 동향 첩보를 3월 하순경부터 입수하여 은밀히 내사해오던 경기도경찰부에서 체포작전을 개시하고 6월 25일경 은신처를 급습하여 붙잡히고 말았다. 곽재기 등 다른 단원들도 각자의 은신처나 연고지에서 연이어 잡혀갔고, 밀양과 진영의 폭탄도 모두 압수되었다. 1921년 3월 예심 종결로 기소되기까지 경찰과 검사국에서 온갖 고문과 악형이 가해졌지만 혀를 깨물고 입을 다물어 한 마디도 자백하지 않았다. 혐의사실은 다른 피의자들의 진술을 통해서만 일제 검경에 인지되고 극히 일부만 적시됨으로써 거의 ‘백지기소’처럼 되었다.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폭발물취체규칙 및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7년을 받았다. 마포 경성형무소에 투옥되어 옥고를 겪고, 1926년 4월 24일 풀려났다. 그 사이 어린 자녀 2명이 세상을 떠났다. 풀려나고 1년 후부터 밀양의 사회운동 조직에 들어가서 혁신과 단결을 기하도록 하며 항일 기반 다지기와 역량 강화에 힘썼다. 우선은 청년운동에 가담하여 1927년 3월 밀양청년회 집행위원이 되었고, 그해 10월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연령 상한 문제로 곧 사임하였다. 1927년 5월 소수의 일본인 지주에게는 득이 되나 다수 군민에게는 손해를 끼칠 밀양군청 이전에 반대하여 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9일 밀양공립농잠학교 1·2학년생 전원이 동맹휴학에 돌입하자 교섭위원이 되어 학교 당국을 상대로 활동하였다. 밀양공립보통학교 6학년생 김외득(金外得)이 운동장 보수작업에 무리하게 동원되었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조사위원 대표로 선임되어 학교당국의 사과와 재발방지 서약을 받아냈다. 언론운동과 한글운동에도 참여하여 힘을 보탰다. 일제의 극심한 언론통제에 맞서는 새로운 민족지 육성 방안의 하나로 안희제(安熙濟) 등 영남 출신 민족자본가들을 중심으로 중외일보사(中外日報社)를 인수하여 주식회사로 재창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적극 호응하여 발기인으로 동참하으며, 1928년 11월 서울에서 개최된 창립총회에 참석하였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이 되었으며, 그해 10월 31일 서울에서 개최된 총회에 참석하였다. 신간회(新幹會) 운동에도 열의를 갖고 헌신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마지막에는 ‘해소론’에 반대하여 조직을 지켜내려고 애썼다. 준비위원이 되어 성사시킨 1927년 12월 19일의 밀양지회 창립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군내 선전홍보 및 조직 확충, 인근지역 지회와의 유대증진 활동을 펴고 본부 대회에도 출석하였다. 1928년 3월 밀양에서 로치데일(Rochdale)식 협동조합이 설립될 때 준비위원 대표로 활약하였고, 동년 10월 제3대 조합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아울러 협동조합운동 종국의 목적이 정치운동과 무관하지 않음을 역설하였다. 1929년 6월 28~29일 서울 종로의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신간회 전국복대표대회에 밀양·양산(梁山)·울산(蔚山) 3개 지회를 포괄하는 양산소구회 대표로 참석하여, 11인 전형위원 중 경남 몫 위원으로 선임되어 추천권을 적극 행사하였다. 본인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 후 압도적 득표로 서기장에 선임되고, 본부 집행부의 서무부장 직도 겸임케 되어 종로통 송현동(松峴洞)에 단신 거처를 마련하고 7월 10일부터 집무를 시작하였다. 7월 중순에 갑산화전민사건(甲山火田民事件) 관련으로 이관용(李灌鎔)·김병로(金炳魯)와 함께 조선총독부에 대한 항의문을 작성하여 8월에 방문 수교하였고, 7월 하순 전라남북도 지방의 13개 지회 순회에 나섰다. 8월 28일부터 10일간의 일시 귀향 중 숙원이던 신간회 경남도지회 연합회 설립을 밀양지회가 주도해가도록 권고, 추동하였다. 1929년 11월 9일 광주(光州)에서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충돌사건 진상조사를 위해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허헌(許憲), 재무부장 김병로와 함께 광주로 가서 3일간 검·경 및 학교 등 유관기관을 방문하며 사건 진상 파악과 구속학생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0년 11월 전체대회대행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위원으로 재선임되었다. 그러나 과로로 인하여 숙환이 악화되었기에, 부득이 서기장 겸 서무부장 직을 사임하고 12월 5일 귀향하여 병석에 눕게 되었다. 1931년 5월 신간회 제2차 전체대회에서 해소안이 졸속 가결되고 일제 경찰이 그 결과를 밀어붙임에 따라 신간회는 해체되었다. 1931년 9월 2일 밀양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수십 개 사회단체 공동 주관의 사회장이 거행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온 수만 명 조문객의 애도 속에 부북면 용지리 선영에 묻혔다. 사후에 언론과 동지로부터 “한없이 강직하며 용감하여 기대를 많이 받았다,” “명망과 실상이 상부하고 열정이 강하며 지혜와 성심이 있고 수완이 있는 인물”이었다는 평언이 나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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