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加勒
洪加勒1913. 10. 19 ~ 1964. 7.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의열단
- · 조선혁명군사간부학교
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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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9) 1913년 10월 19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음덕면(陰德面, 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南陽里)에서 감리교 목사인 홍형준(洪亨俊)과 김애서덕(金愛西德)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이명은 원세무(元世武)·김웅진(金雄鎭)·김수환(金秀煥) 등이다. 조부는 하와이 신민회 회장을 지낸 홍승하(洪承河) 목사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9세 때 부친이 수원군 성호면(星湖面) 오산리(烏山里, 현 오산시) 소재 오산예배당으로 전임되면서 가족도 이사하였다. 1927년 3월 오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4월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고학하면서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형성해갔다. 1932년 3월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그 후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 온양면(溫陽面) 온천리(溫泉里)의 온천예배당에서 부친의 교회 일을 도왔다. 같은 해 8월 조부의 친구인 정재관(鄭在寬)의 소개로 서울 김기순(金基淳) 집에서 가정교사로 생활하다가, 11월 김기순이 황해도 안악(安岳)으로 이사하면서 실직하였다. 이를 계기로 펑톈(奉天)으로 가서, 먼 친척이 운영하는 조선요리점에 머물렀다. 1933년 5월 봉천조선청년회가 주최한 전만(全滿)청년현상웅변대회에서 3등에 뽑혔다. 같은 해 7월경 조선요리점에 놀러온 김수길(金壽吉)로부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이하 간부학교) 입교를 권유받았다. 김수길은 간부학교 1기 졸업생으로 펑톈 지방에서 2기생 모집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1933년 9월 펑톈을 출발하여 상하이(上海)와 난징(南京)을 거쳐 장쑤성(江蘇省) 장닝현(江寧縣) 장닝진(江寧鎭)에 있는 간부학교에 도착하였다. 교장 김원봉(金元鳳)과 면담한 후 의열단에 가입하고 간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약 6개월의 교육을 받고 동기생 53명과 1934년 4월 간부학교를 졸업한 후, 학교에 「농촌운동에 관한 의견」, 「조선농지령에 대한 비판」 등의 논문을 제출하였다. 1935년 5월 초순 김원봉과 교관 윤세주로부터 선발대로서 국내에 침투하여 공작활동을 하라는 명령을 받고 난징을 거쳐 칭다오(靑島)에 도착하였다. 이어서 다렌(大連)·평톈·안둥현(安東縣)을 경유하여 5월 12일 평안북도 의주(義州)에 도착하였고, 서울을 거쳐 5월 15일 본가가 있는 온양에 이르렀다. 이후 공장직공으로 취직하여 동지를 포섭하고 나아가 조선공산당 재건 및 반제동맹을 결성한다는 계획으로 5월 24일 평양에 도착하여 여러 공장에 취직을 알아보았으나 실패하였다. 배재학교 동창생 정삼현(鄭三賢)을 포섭하고 의열단 본부와 연락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다음, 요통을 치료하기 위해 6월 2일 온양으로 귀가하였다. 이후 경찰관이 되면 일제 당국의 주목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점과 농촌운동을 하는 데 적격이라고 판단하고, 7월부터 순사시험 강의록을 구독하며 시험 준비를 하였다. 그러던 중 11월 11일 간부학교 동기생 김찬서(金燦瑞)의 자수로 경기도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1935년 2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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