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重鎬
崔重鎬1891. 1. 20 ~ 1934. 3. 2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민회
- · 인성소학교
- · 상해거류민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관련 사건
- · 안악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77) 1891년 1월 20일 황해도 신천군(信川郡)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황훈(黃勳)이다. 1908년 황해도 안악(安岳)에 세워진 양산학교 교사로 활동한 김구(金九)의 제자였다. 김구 밑에서 공부하던 중 평양으로 가서 대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김구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포살사건(砲殺事件)에 연좌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이후 항일구국운동에 참여하였다. 1911년 2월 이른바 ‘안악사건’ 피의자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안악사건은 1910년 11월 안명근(安明根)이 서간도(西間島)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다가 황해도 신천지방에서 관련 인사 160명과 함께 검거된 사건이다. 이중 신천 지역 피의자는 이원식(李源植)·박만주(朴晩俊)·신백서(申伯瑞)·이학구(李學九)·유문형(柳文馨)·이승조(李承祚)·박제윤(朴濟潤)·배경진(裵敬鎭) 등이었다. 심문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허위자백을 강요받았다. 결국 일제 경찰이 원하는 대로 대부분 허위자백을 하였다. 강요된 허위진술을 유일한 근거로 일제 측은 이른바 강도 및 강도미수죄, 내란미수죄, 모살미수죄의 명목으로 사건을 왜곡·과장하였다. 결국 서대문형무소에 미결수로 9개월간 구금되었다가 유형을 받아, 2년 3개월간 전라도 진도로 유배되었다. 1914년 풀려나 고향 신천으로 돌아온 후 다시 군자금 모금을 목적으로 일제 관청과 현금 수송차를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재수감되었다. 징역 13년을 받고 복역 중 1917년 5월 파옥(破獄)·탈출하여 만주를 거쳐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이때부터 황훈(黃勳)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1919년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참여하여 주로 상하이 지역 교민들의 권익과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 상하이 거주 교민 2세들의 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인성소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여운형(呂運亨)의 후임으로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교장 시절 임시정부 산하 외곽단체인 상하이 거류민단 단장도 겸임하며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윤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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