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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80. 2. 28 ~ 1968.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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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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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주(楊州)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양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한민국임시정부
  • · 구미위원부
  • · 대한인단합회
  • · 중한민중동맹단
  • ·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총지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80년 2월 28일 경기도 양주부(楊州府, 현 서울시 공릉동) 석적면(石積面) 항동(項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천령(川寧, 현재 여주)이다. 호는 석정(石丁)이다. 이명은 성린(聖麟)·반(槃)·송원상(宋元相)이다. 부친 제창(濟昶)은 충청남도 직산과 강원도 인제 현감을 지냈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투옥된 적이 있다. 1881년 서울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12세에 전의(典醫) 이해창(李海昌)의 딸과 혼인하였다. 전통적인 한학 교육을 받다가 1897년 관립 한성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영국인 교사 2명(W. du F. Hutchinson, T. E. Hallifax)과 한인 교사들로부터 일반독본·과학독본·지리·산술 등을 배웠다. 일요일에는 배재학당에 나가 서재필(徐載弼)의 강연을 듣고 독립협회(獨立協會)의 개혁운동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영어학교 교장 허치슨의 고압적인 태도에 반발하여 1898년 가을에 학교를 그만 두었다. 1899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슌덴중학교(順天中學校)에 다니며 영어·수학·대수·기하·삼각·물리·화학 등을 배웠다. 유학 중 친구의 권유로 YMCA 영어성경반에 들어갔다가 침례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1902년 졸업 후 일본 데이고쿠대학(帝國大學)을 진학하려 하였으나, 학비 문제로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하와이 이민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동서개발회사(East-West Development Company)에 취직하였다. 여기서 이민을 희망하는 한국인들을 하와이까지 인솔하여, 통역을 해주고 감독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903년 2월 임신 중인 아내와 함께 두 번째 이민선인 캅틱(Coptic)호를 타고 3월 3일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이후 4년 넘게 하와이에 체류하는 동안 사탕농장 한인 노동자들에 대한 통역을 담당하였고, 자치단체를 만드는 일에서부터 교회의 순회 전도사 겸 설교사로서 예배당 건립에 이르기까지 교민사회의 기초를 닦는 데 기여하였다. 1907년 5월 아내와 하와이에서 출생한 세 자녀를 데리고 귀국한 후 선교사 존스(G. H. Jones)의 소개로 정동제일감리교회의 부목사로 취임하였다. 1908년 해리스(M. C. Harris) 감독으로부터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9년 협성신학교에 입학한 뒤, 1911년 12월 20일 최병헌(崔炳憲)·전덕기(全德基) 등과 1회 졸업생이 되었다. 1910년대 상동청년학교 교장, 감리교 주일학교 총무,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 주일학교연합회 총무, 동양선교회 파송대표 등의 직책을 맡으며 선교와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친일적 성향의 선교사들과 관계를 맺는가 하면, ‘조선견학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기도 하였는데, 후일 “원통하고 분한 마음을 가슴 속에 품고 뒷날을 예비하고자 민족의 정신과 지성을 계발함이 득책(得策)일까 하여 교육과 목회 및 순회강연 등에 전력했다”고 술회하였다. 1919년 1월 기독교 측 인사들의 만세운동 거사 계획에 참여하였다. 2월 19일 기독신보사 주필 김필수(金弼秀)와 더불어 남대문 밖 제중원 약방주임 이갑성(李甲成)에 갔는데, 거기서 이승훈(李昇薰)·안세환(安世桓)·오기선(吳基善)·박희도(朴熙道) 등이 독립운동에 대해 토의하고 있었다. 그 후 천도교 측의 최린과 두 차례 만나 거국일치의 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외교 및 통신 임무를 맡은 후 2월 24일 밤 서울을 빠져나가 신의주·펑톈(奉天)·톈진(天津)을 거쳐 3월 1일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자, 프랑스 조계(租界) 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차려 총무직을 맡았다. 상하이로 국내외 주요 민족운동단체의 대표자들이 모여들었고, 그해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때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차장을 맡았고, 8월 내무차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러시아에 위치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특파되어 이동휘(李東輝)·문창범(文昌範) 등을 상하이로 불러들였으며, ‘통합’임시정부를 출범시켰다. 얼마 뒤 이른바 한성정부(漢城政府)의 승인-개조 논쟁으로 통합임시정부에 균열이 발생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무차장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미국에서 활동 중이던 임시대통령 이승만(李承晩)에 의해 워싱턴의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임명되자 1920년 6월 25일 상하이를 출발, 유럽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 무렵 이승만과 구미위원부의 초대 위원장 김규식(金奎植)이 상하이로 가기 위하여 워싱턴을 떠나자,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 겸 장재(掌財)의 직책을 맡아, 서기를 맡은 네브라스카대학 출신 정한경(鄭翰景)과 구미위원부를 운영하였다. 1920년 말부터 미주 각처의 한인사회를 순방하면서 구미위원부에 대한 재정 지원을 호소하는 한편, 미국 정부와의 공식적인 외교관계 수립을 위한 공사관 설립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대사관 설립 구상은 정한경과 필라델피아통신부를 맡고 있던 서재필의 반발, 이승만의 제지로 무산되었으며, 임시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다. 곧이어 하와이에서 상하이로 돌아온 뒤, 여운형·최창식 등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미국의 워싱턴군축회의에 맞서기 위하여 모스크바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를 개최하자, 조선예수교대표회의 위임장을 갖고 참석하였다. 회의에 참석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현동무’ 또는 ‘목사동무’로 불렸고, 레닌과 트로츠키 등에게도 소개되었다. 상하이로 돌아온 후에는 임시정부의 진로를 포함하여 독립운동의 제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에 참여하였다. 1923년 2월 하와이로 건너가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의 목사로 시무하다가, 1926년 카우아이(Kauai) 섬으로 가서 한인 350여 명을 대상으로 목회 활동을 하였다. 또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1931년 4월 카우아이에서 대한인단합회(大韓人團合會)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인구세·애국금·군사후원금 등을 거두어 임시정부로 보냈다. 1936년 11월 임시정부로부터 하와이군도(群島) 선유위원(宣諭委員)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국내에서 신사참배 문제로 기독교인들이 탄압을 받자, 하와이 한인예수교연합회 회장에 선출되어 신사참배 문제에 대처하였다. 1940년 카우아이의 목사직에서 퇴임한 뒤 호놀룰루로 옮겨 다시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듬해 12월 태평양전쟁 발발을 앞두고 포트 섀프터(Fort Shafter)의 미국 육군 정보부를 찾아가 영관급 장교와 면담하면서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을 예고하기도 하였다. 특히 워싱턴에서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과 대립하였고, 중한민중동맹단(中韓民衆同盟團, Sino-Korean Peoples’ League)의 워싱턴대표 한길수(韓吉洙)의 선전활동을 후원하였다. 1943년 7월 중한민중동맹단의 다수파가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총지부를 결성하자, 이듬해 1월 집행위원과 상무위원회 총서기를 맡아 100만원 군자금 모집운동에 나서며,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활동을 지지 후원하였다. 또 임시정부 내의 좌우합작과 연립정부 구성을 촉구하였으며, 진정한 혁명을 원한다면 파벌과 시기심을 버리고 ‘민중’ 본위로 뭉칠 수 있어야 하며, 임시정부도 국제적 지지와 승인을 얻을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1945년 4월 25일 연합국 50개국이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전후 세계평화와 안전보장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하자, ‘한국대표단’의 참가를 요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전후 모든 국가의 안보를 지속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회의 주최국인 미국은 한국대표단의 참가를 거부하였다. 1945년 7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지부 위원장을 맡는 한편, 호놀룰루 전쟁포로수용소(Prisoner of War Base Camp, APO 950)에서 한국인 포로들에게 한국어와 영어를 가르치기 위한 훈련교관을 맡았다. 저술로는 1909년 국내에서 출판된 『포와유람기(布哇遊覽記)』가 있다. 그리고 미간행 원고인 「현순자사(玄楯自史)」, 「화성돈실기(華盛頓實記)」, 「석정집(石丁集)」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고정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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