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日鳳
崔日鳳1884. 12. 20 ~ 1970. 6. 2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4년 12월 20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의주면(義州面) 동외리(東外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최덕성(崔德成)이다. 1919년 평북 의주읍 만세시위에 참여, 1921년 베이징(北京) 각 신문에 한국 독립에 대한 여론을 환기하는 논문을 게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평북 의주 읍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시위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목사 유여대(劉如大)가 주도하였다. 유 목사는 3월 1일 직전 정명채(鄭明菜)·이두칠(李斗七) 등 동지 20여 명을 의주 읍내 양실학교에 소집하여 긴급회의를 열고 서울과 똑같이 3월 1일 오후 2시에 거사를 결행하기로 하였다. 장소는 읍내 서부교회 광장, 즉 양실학교 운동장으로 정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양실학교 운동장에는 양실학교 교직원과 학생, 학부형 그리고 사전에 연락해 두었던 기독교인 등 1천여 명이 모였다. 유 목사가 서울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황대벽(黃大璧)이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한 후 일동이 만세삼창을 외치고 학생들은 독립가를 부르며 만세시위에 들어갔다. 이날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해 4월 만주를 거쳐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베이징 징진(京津)신문사에서 여비를 지원받아 상하이 삼육대학(三育大學)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던 중 미국·영국·일본·중국 등 9개국이 참여하여 군축 문제를 다루는 국제회의인 태평양회의가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1921년 9월 26일 베이징 각 신문에 “극동평화는 조선독립이 되지 않고는 원만한 해결을 얻지 못하리라”라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 태평양회의는 파리강화회의 결과 일제가 중국 및 태평양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강화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미국이 주도한 회의였다. 1921년 7월 이 소식이 알려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8월 13일 태평양회의한국외교후원회를 조직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이어 연합국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자 하였다. 베이징 각 신문에 실린 글은 임시정부의 뜻과 같이 독립에 대한 여론을 널리 환기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런 자신의 뜻을 일제 당국자에게 이해시킬 목적으로 1921년 8월 상하이에서 일본 요코하마(橫濱)로 가는 카스가마루(春日丸)를 타고 도쿄(東京)로 갔다. 배가 나가사키(長崎)·모지(門司)·고베(神戶)·요코하마 등의 항구에 정박할 때마다 각 경찰서에서 형사가 나와 미행하였다. 도쿄에 온 뒤에도 와세다(早稻田)경찰서 경찰 3명이 출입과 왕래를 엄중히 감시하였다. 그해 11월 17일 돌연히 붙잡혀 일본에 건너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날 취조를 받고 당일 바로 방면되었다. 그러나 도쿄로부터 퇴거 명령을 받아 강제로 귀국하게 되어 11월 22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날 밤 곧바로 의주로 송환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대원⋮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