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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89. 3. 27 ~ 1950.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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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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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청양(靑陽)의열투쟁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청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홍주의병
  • · 오적암살단
  • · 독립의군부
  • · 풍기광복단
  • · 광복회
  • · 광복단결사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8) 1889년 (음)3월 27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사양면(斜陽面) 흥산리(興山里)에서 한성교(韓省敎)와 창령 서씨의 둘째로 태어났으며, 당숙인 한호교(韓互敎)에 입양되었다. 본명은 우석(禹錫),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호는 송촌(松村), 자는 훈(焄)·성초(省初)이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했으며, 홍주의병에 참여 전사한 외숙(外叔)의 유언을 듣고 친형인 한태석(韓泰錫)과 홍주의병에 참여했으나 패한 후에는 이용규(李容珪)부대에 소속되어 충남 부여(扶餘)·노성(魯城)·연산(連山) 등지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7년경 충남 논산(論山)의 신도안(新都案)으로 거처를 옮긴 후 나철(羅喆)·기산도(奇山度)·윤이병(尹履炳) 등과 을사오적 처단 결사대에 참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2년에는 유장렬(柳璋烈)·윤상보(尹尙普) 등과 독립의군부에 참여했다. 1913년에는 채기중(蔡基中)·전원식(全元式)·정성산(鄭性山) 등이 조직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에 참여했으며, 이후 독립의군부 인물들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며 무기구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왔으며, 1914년에는 직산금광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군자금 모집활동 중 대구에서 조직된 광복회에 참여하여, 1916년 5월 이병온(李秉溫)·장남칠(張南七)·유장렬 등과 전라도 보성(寶城)의 양재성(梁在誠)과 벌교(筏橋)의 서도현(徐道賢)을 처단했으며, 1917년 1월에는 벌교에서 유장렬·고제신(高濟臣) 등과 다시 서도현의 당질인 서인선(徐仁善)을 납치해 군자금 1만 원을 모집하기도 했다. 1918년 1월 충청도지부원 장두환(張斗煥)을 시작으로 박상진(朴尙鎭)·채기중·김한종(金漢鍾)·김경태(金敬泰)·임세규(林世圭) 등이 붙잡히면서 조직이 와해되자 만주로 망명해 재기를 도모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후 귀국하여 은신했던 광복회 동지들과 활동을 재개했으며, 1920년 2월 서울에서 조선독립군사령부(朝鮮獨立軍司令部, 일명 광복단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광복단결사대는 인재를 선발해 국외에서 독립군으로 양성하고, 국내에서는 단을 조직해 일제 관리 및 친일파를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집한다는 방략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고자 하였다. 1920년 2월 불변단(不變團) 부단장 박문용(朴文鎔)과 상하이(上海)로 파견, 박문용의 소개로 임시정부 교통차장 김철(金澈)을 만나 광복단결사대 조직 계획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2월 26일 김철의 소개로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를 비롯해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 임시정부 총·차장을 초대하여 만찬회를 개최하였다. 만찬회에서 결사단과 암살단 조직에 필요한 권총과 기타 무기의 공급과 지원을 요청하여,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2월 28일에는 안창호(安昌浩)와 구체적인 논의를 한 다음 귀국하였다. 같은 해 4월 서울에서 박문용·우재룡(禹在龍)·임기현(任箕鉉) 등과 모병과 암살이라는 목표를 수립하였다. 즉 결사대를 조직해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이완용(李完用)·송병준(宋秉畯) 등 민족반역자와 한인 형사 등을 처단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고제신(高濟臣)·임성태(林聲泰) 등과 전라북도 전주(全州)·군산(群山)·김제(金堤)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그해 5·6월경에는 박문용과 전라남도 광주(光州)의 노진영(盧軫永)에게 1천원의 자금을 모집하였다. 자금 모집활동 중 1920년 5월 미 의원단의 서울 방문 소식을 듣고 환영나오는 조선총독 및 정무총감 등을 처단하고자 하였다. 미국의 상·하의원과 가족들이 8월 상하이로 와서 서울을 거쳐 도쿄로 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알리고자 하였다. 7월 7일 중국 안둥현(安東縣)에서 북로군정서의 최우송(崔友松)으로부터 ‘모젤·콜드·브로우닝’ 권총 3정과 실탄 300발, 폭약 등을 받아 국내로 들여왔으며, 의거를 준비 중이던 암살단과 연합을 추진하였다. 1920년 7월 31일 동대문 밖에 있는 암살단원 김상옥(金尙沃)의 집을 방문해 광복단결사대의 계획을 설명하고 의거에 대해 논의하였다. 8월 2일 김상옥의 집에서 다시 만나 구체적인 의거 계획을 세웠고, 8월 20일에는 김상옥과 만나 무기 제공을 약속하고, 21일에는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와 미국기를 제작하며 의거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미 의원단 도착 하루 전인 8월 23일 대대적인 예비검속이 이루어졌고, 김상옥의 집이 수색을 당하였다. 김상옥은 만세운동 후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간하다가 발각된 일이 있어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었기 때문에 가택 수색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김상옥은 도피하였으나 암살단취지서를 비롯해 암살단원 명부 등이 압수되었다. 그 결과 김동순(金東淳)·서대순(徐大順)·이운기(李雲基)·신화수(申華秀)·김화룡(金華龍)·최석기(崔錫基)·이돈구(李敦九)·조만식(趙晩植)·명제세(明濟世)·최영만(崔英漫)·유연원(柳演元)·윤익중(尹益重)·서병철(徐丙轍)·김태원(金泰源)·박문용 등과 함께 붙잡히고, 광복단결사대와 암살단 조직이 해체되었다. 1921년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받고, 1922년 전주감옥에서 옥고를 겪던 중 1916년 벌교부호 서도현 처단 등이 추가로 발각되어 5년이 추가되었다. 1929년 2월 22일 형집행 정지로 풀려나, 충남 신도안에서 신병을 치료하며 은거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상경해 1945년 11월 양한위(梁漢緯)·윤형중(尹瑩重) 등과 광복단을 재건하고, 광복의숙(光復義塾)·실험농장·내외사정조사회 등을 조직하여 민족교육과 산업부흥운동을 펼쳤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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