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鳳洙
韓鳳洙1883. 4. 18 ~ 1972. 12. 2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한봉수 의병부대
- · 조운식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 · 1919년 청주군 북일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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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3) 1883년 4월 18일 충청북도 청주군(淸州郡) 북일면(北一面) 세교리에서 아버지 한진영(韓進榮)과 어머니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는 청암(淸巖)이다. 이명은 한봉용(韓奉用·韓鳳龍)·한봉서(韓奉瑞)이고, 한자를 달리한 한봉수(韓奉洙)를 쓰기도 하였다. 시조 태위공(太尉公) 란(蘭)의 31세손이고, 중시조 충의공(忠毅公) 온(蘊)의 15세손이다. 선대 중에는 무신으로 무공을 쌓은 인물이 많으나 17세기 이후에는 한미한 가문으로 전락하였고, 그의 대에 이르러는 상민 정도의 처지였다. 13대조 근(瑾)의 묘소가 세교리에 있던 것으로 보아, 상당기간 세거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10세 전후 인근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어려서부터 사격과 사냥에 능하였다고 전한다. 1907년에는 생계를 위해 충북 괴산군(槐山郡) 청안면(淸安面) 장암에 있는 타면(打綿) 공장에서 일하였다. 그해 8월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는 상황을 보고, 국권회복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그해 9월경 해산군인 출신인 김규환(金奎煥)을 만나 함께 의병으로 봉기하였다. 그리고 9월 15일 미원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다. 10월 28일에는 문의군(文義郡)을 습격하여 군수를 처단하고 분파소와 군아의 물품을 징발하였다. 11월 25일에는 세교리 장터에서 일본인 금광업자를 습격하여 집을 불태우고 재물을 빼앗았다. 12월 2일에는 세교에서 우편물을 습격하였고, 18일에는 다시 미원에서 일제 경찰대와 교전을 벌였다. 1908년 1월 9일 부하들을 이끌고 세교장터를 습격하고, 교자동에서 일진회원 김홍식(金弘植)을 처단하였다. 당시 이를 조사한 청주경찰분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한봉수 의병부대는 대략 20~30명의 소규모로 구성되어 있으며, 검은색이나 흙 색깔의 옷을 입고 화승총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2월 25일에는 세교에서 우편물을 습격하였다. 4월 3일에는 세교에서 김규환 등 20여 명과 우편물을 습격하여 3,000원을 노획한 뒤, 은화와 동화는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지폐는 김규환이 군자금으로 사용하였다. 그해 (음)3월경에는 부하 김명심(金明心) 등과 함께 산내일면 일원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5월 9일에는 김규환과 석성국(石成國)·한경천(韓敬川) 등 부하 40여 명과 초정에서 청안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매복하고 있다가 일본군 기병 2명이 호위하던 우편행랑을 공격하여 일등병 나카자와(中澤直惠)를 사살하고 현금 2,000원을 노획하였다. 6월 10일에는 김규환과 부하 6~7명을 데리고 오근장에서 진천으로 가는 10리 지점인 진천군(鎭川郡) 문백면(文白面) 옥성리(玉城里) 보리밭에 매복한 후, 지나가던 일제 헌병 2명을 공격하여 상등병 시마자키(島崎善治)를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같은 해 2월 의병 해산을 종용하기 위해 파견된 충청북도선유위원 송기용(宋綺用)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에게 올린 보고서에는 이러한 신출귀몰한 활동이 잘 기술되어 있다. 이후 일제는 실제 체포하지 못한 상황에서 궐석재판을 진행하였고, 결국 1908년 11월 20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을 받았다. 1909년 충청지역에서 의병의 활동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일제는 다시 체포에 열을 올렸다. 이 과정에서 뛰어난 사격 실력과 유격전에 능하였기 때문에 진위대 상등병 출신이라고 잘못 보고되기도 하였다. 그해에는 청주와 괴산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밀정과 헌병보조원을 처단하고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다양하게 항일투쟁을 펼쳤다. (음)5~6월경에는 부하들과 속리산에 주둔하면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6월 25일에는 군자금 납부를 약속하였다가 배신하고 이를 일제 경찰에게 밀고하여 부하 두 명을 붙잡히게 한 방인재(方仁才)를 처단하였다. 6월 29일에는 부하 이정구(李正九) 등 7명과 함께 괴산군 서면 사치(沙峙, 일명 모래재)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우편물을 호위하여 통과하던 일본군 2명을 공격해 1명을 사살한 후 총기와 현금을 노획하였다. 9월 29일에는 이정구 외 3인에게 명하여 북이면 화죽리에 거주하던 헌병 밀정 박래천(朴來舛)을 처단하였다. 10월 1일에는 미원 옥화대(玉華臺) 부근에서 미원헌병분견소 소속 헌병의 추격을 받던 중, 척후병으로 뒤따르던 헌병보조원 정태헌(鄭泰憲)을 저격하여 부상을 입혔다. 같은 해 후반기에는 의병부대의 활동영역을 경북까지 확대하였다. (음)8월 경에는 상주군(尙州郡) 화북면(化北面) 용화리 조동 남주사(南主事)의 집에서 의병장 조운식(趙雲植)의 부하였으나 변절하여 의병의 동향을 일제 관헌에게 밀고한 정화춘(鄭化春)과 전경모(全京模)를 처단하였다. 이후 조운식 의병부대와 연합한 후, 조운식에게 총대장을 맡기고 부장(副將)이 되었다. 8월 5일 조운식 부대원 500여 명과 영천군의 한 주막에서 식사 도중 일본군에 포위당해 전투를 벌이다가 패퇴하였다. (음)9월에는 조운식 의병부대와 함께 충북으로 이동해 활동하였다. 9월 19일에는 청산군(靑山郡) 서면(西面) 석성리(현 옥천군 청성면 화성리)의 김한기(金漢基)·김홍기(金弘基) 집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려다가 주민들과 충돌하였다. 9월 30일에는 조운식과 협의하여 청천면장 진필오(陳必五)의 집에 창의고유문(倡義告諭文)을 휴대하고 들어가서 40원, 같은 날 산외이면 면장 홍모(洪某)로부터 같은 방법으로 13원을 각각 모금하였다. 이 연합부대는 그해 (음)10월경 이범윤(李範允)이 이끄는 러시아 연해주 의병부대와 연계하여 최후에는 연해주로 이동하고자 하였지만, 10월 15일 조운식이 영동경찰서에 붙잡히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1910년 2월 중순에는 대부분의 부하를 잃고 근거지를 상실한 채 처가가 있는 서울로 잠입하였다. 더이상 도주와 은거가 불가능해지자 황익주(黃益周)를 통해 충북 주사 윤병희(尹秉禧)에게 자수 출원 의사를 밝혔다. 그러면서 자수의 조건으로 전북 무주(茂朱)를 근거로 전북·충북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문태수(文泰洙) 의병장의 체포에 협조하겠다는 의견을 내세웠다. 이에 일제는 영동경찰서로 불러 문태수의 근거지를 수색하였지만 체포에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있던 중 5월 15일 충북경찰부에서 보낸 형사대에 붙잡혀 압송되었다. 이러한 소식은 즉각 통감, 내부대신, 내부차관, 경시총감, 헌병대장, 군사령관에게 보고되었다. 이후 심문을 담당한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 검사 오노 도쿠시로(小野篤次郞)는 5월 28일자로 내부 경무국장 마츠이 시게루(松井茂)에게 자수 출원 사실을 조회하는 전보를 보냈다. 경무국장은 자수 출원은 사실이나 당국이 이미 증거를 완비하였고, 부하들도 체포된 상황이므로 붙잡아 연행하였다고 회신하였다. 1910년 6월 29일 공주재판소 청주지부에서 무려 27개의 항일투쟁과 활동상을 증거로 확보한 일제에 의해 이른바 내란죄 수범으로 교수형을 받았다. 이후 법정투쟁을 통해 15년 유형(流刑)을 받고 옥고를 겪다가 그해 8월 29일 경성공소원에서 이른바 칙령 제325호 합방대사령(合邦大赦令)으로 사면·면소되어 풀려났다. 이후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탄압을 받으며 생활하였다. 당시 자택이 명소로 알려진 초정약수터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일제 고위관료의 행차가 있을 때에는 철저하게 가택연금을 당하였다. 한편 때로는 투전판에 어울리는 방탕한 생활로 위장하여 일제의 감시를 누그러뜨리곤 하였다고 전한다. 1919년 2월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홍명희(洪命憙)와 함께 인산(因山)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2월 27일 손병희(孫秉熙)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손병희로부터 만세운동 계획을 전해 듣고 고향의 만세운동을 주도할 것을 당부받았다. 그리고 인산에 참례하고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목격한 뒤 귀향하였다.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자 기회를 엿보던 중 3월 7일 청주 장날 서문동 우시장에서 장꾼들을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4월 1일 정오 경에는 고향 세교리에서 내수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다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날 내수보통학교 학생 85명이 엄익래(嚴翼來) 등 교사의 인솔 하에 나무를 심으러 가기 위해 세교리 구장터를 지나고 있는 것을 보고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권유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만세시위는 인근 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미원장터 만세시위를 촉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 일로 다시 붙잡혀 그해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또 한 차례의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박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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