蔡應彦
蔡應彦1883 ~ 1915. 11. 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서태순 의병부대
- · 진동본진분파대
- · 채응언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후기의병(태순 의병부대
- · 진동본진분파대
- · 채응언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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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능중면(陵中面) 고익리(高益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5년 당시 33세이므로 1883년생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인천(仁川)이며, 이명은 채응원(蔡應元)·채응경(蔡應慶)·채도석(蔡道錫)이다. 1907년 (음)7월경 유인석(柳麟錫) 계열의 서태순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소모장으로 활동하다가 황해도 곡산(谷山)에서 의병장이 전사하자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1908년 봄에는 황해도 일대에서 새롭게 의병부대를 정비하고 진동본진분파대장(鎭東本陣分派大將) 명의로 그해 5월 「보국창의문(輔國倡義文)」을 발표하였다. 포수와 농민 등으로 구성된 채응언 의병부대는 최대 100여 명에 이르렀지만, 보통 50명 내외였다. 한편 이진룡(李鎭龍)·한정만(韓貞萬)·김정환(金貞煥)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할 때에는 500명의 군세를 이루기도 하였다. 이진룡 의병부대에서는 부장(副將)으로 활동하면서 평남·강원도·함경남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부터 독립적으로 의병부대를 이끌면서 황해도 안평순사주재소(安平巡査駐在所) 공격을 시작으로 수안헌병분견소(遂安憲兵分遣所)를 습격하여 다수의 일본군 무기를 노획하였다. 그리고 노획한 무기로 부하들을 무장시켜 의병부대의 전투력을 한층 높였다. 같은 해 8월 22일에는 김억석(金億石) 의병부대 등과 연합하여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강원도 이천군(伊川郡) 방장면(方丈面) 구당리(龜糖里)를 공격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천수비대·헌병토벌대와 치열하게 교전하였다. 11월 9일에는 부하 23명을 이끌고 곡산군 이화동(梨花洞) 부근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강원도가렴주분견소장(江原道佳廉州分遣所長) 후쿠다(福田)가 상등병 2명과 보조원 4명을 이끌고 함남 영풍사(永豊社) 대송동(大松洞)으로 추격해 왔다. 추격대와 약 1시간 동안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의병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1910년에는 주로 소규모 부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였지만, 연합 작전도 실시하며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한층 강화하였다. 그해 3월 1일 13명의 부하를 이끌고 함남 안변군(安邊郡) 영풍사(永豊社) 금구동(金龜洞)에서 전투를 벌인 이후 일본군과의 교전이 증가하였다. 4월 2일에는 연합작전으로 강두필(姜斗弼)·이봉춘(李奉春) 의병부대와 함께 영풍사 법동(法洞)에서 신계점(新溪店)분견소를 공격하여 3시간 동안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4월 12일에도 부하 23명을 이끌고 강천돌(姜千突) 의병부대 43명과 연합작전을 펼쳤다. 그리고 이천군 방장면(方丈面)에서는 가려분견소(佳麗分遣所) 일본군 헌병과 보조원 등과 약 30분간 격전을 치렀다. 일본군의 반격도 거세어져 4월 19일에는 여주분견소 일본군 헌병 1명과 보조원 3명에 의해 영풍사에서 부대원 5명이 붙잡혔다. 4월 20일에는 16명의 부하를 이끌고 곡산군의 이녕면(伊寧面) 거이소리(巨伊所里), 4월 21일에는 멱미면(覓美面) 장양리(長陽里), 4월 22일에는 동촌면(東村面) 이화리(梨花里) 하새야동(下塞野洞)을 순차적으로 공격하며 들어갔다. 4월 28일에는 23명의 부하를 이끌고 안변군 마전동순사주재소(馬轉洞巡査駐在所)를 습격하여 일본인 순사를 처단하고 무기를 노획하여 의병부대의 전투력을 보강하였으며, 전주(電柱) 23본을 절단하는 등 일본군의 통신시설을 파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5월에도 의병전쟁은 이어져 5월 5일에는 곡산군(谷山郡) 이녕면(伊寧面) 거이소리(巨利所里)를 다시 공격해 들어갔다. 5월 13일에는 영풍사 상리(上里) 감천동(甘泉洞)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계속된 채응언 의병부대의 공격과 통신시설의 파괴, 무기의 약탈 등 피해가 급증하자 주요 거점지역을 중심으로 연합토벌대를 편성하기도 하였다. 이에 채응언 의병부대도 연합의병으로 대응하였다. 5월 22일 강천돌(姜千突)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약 1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영풍사와 이천군 고미탄면(古味呑面)에서 남산역(南山驛)헌병분견소·고산역(高山驛)헌병분견소 연합토벌대와 충돌하여 5시간 동안 치열하게 교전하였다. 그해 6월 3일에는 4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영풍사 하리(下里) 금구동(金龜洞)을 또다시 공격하였다. 6월 13일에는 황해도 선암헌병분견소(仙巖憲兵分遣所)를 기습하여 일제 헌병과 헌병보조원을 처단하고, 무라다 30년식 소총 13정과 탄환 5,800발을 노획하여 의병부대의 전투력을 증강시켰다. 같은 해 6월 21일에는 이천군 고미탄면에서 남산역·고산역헌병분견소 연합토벌대와 다시 충돌하였다. 이에 강두필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85명의 의병을 이끌고 6월 22일 이천군 회낭동(悔浪洞) 산중에서 일제 헌병 2명과 보조원 8명으로 구성된 남산역·고산역헌병분견소의 연합토벌대를 공격하였다. 첫 교전을 약 20분 정도 진행한 후 바로 후퇴하여 추격하는 연합토벌대를 산중의 매복지점까지 유인한 후 포위 공격하여 헌병 1명과 헌병보조원 2명을 처단하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날 고미탄면 왕무소동(往武所洞)에 대한 공격도 이어져 거주인 2명 체포하였다.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수색대를 급파하여 채응언 의병부대에 대한 수색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6월 23일 원산헌병분견대 관할 수색대와 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일본군의 의병 탄압 작전이 한층 강화되기 시작하면서 채응언 의병부대는 부대원을 10~15명 정도로 편성한 소부대로 나눠 유격전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후 주 활동무대인 평남지방으로 이동할 때도 부대를 나눠 이동하였다. 이때 박형원(朴享元)에게 17명의 의병을 나누어 주고 성천군화창분견소(成川郡化倉分遣所)를 습격하도록 한 것처럼 작전 명령만 내리고 부하들의 독립적 활동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채응언의 부하는 성천(成川) 등지에서 십 수 명의 소부대로 활동하였지만 주민에게는 손해를 입히지 않으며, 특히 ‘우리는 대한제국 독립을 위하고 우리 동포를 구호하려는 자’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 단순히 전투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민심을 하나로 묶는 선전활동을 함께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채응언 의병부대의 활동은 전투 외적인 면에서도 나타난다. 첫째,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벌로 일제와 내통한자, 밀고자, 일진회원, 의병을 사칭하고 악행을 저지른 자 등을 처벌하였다. 둘째, 계몽운동 계열과의 연계 활동으로 7월 18일 정예 의병 몇 명을 이끌고 평남 양덕군(陽德郡) 화촌면(化村面)의 사립학교를 방문하여 수업이 끝난 학생들에게 지휘교련(指揮敎鍊)을 관람하도록 한 후, 부대원들에게는 학생들의 체조를 구경하도록 하였다. 당시 계몽운동가들은 신식학교를 설립하여 근대 교육을 추진하는 과정에 교육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 교련과 체조 과목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후에도 의병부대를 이끌고 일본군에 대한 공격, 선전활동, 친일파 처단, 계몽운동 계열과의 연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독립전쟁의 성격으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그해 9월에는 이천군 광북수비대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으며, 진동창의장(鎭東倡義將) 강두필(康斗弼)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강원도 이천, 함남 안변, 평남 성천, 황해도 고산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나, 주로 곡산군의 백년산(百年山) 일대를 근거지로 하였다. 1913년 6월에는 곡산군 대동리 헌병분견소를 공격하여 헌병과 보조원을 처단하고 총과 탄약을 노획하였다. 1914년에는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평원 읍내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경술국치 후에도 1915년 붙잡힐 때까지 활발하게 활동하여 일본군을 위협하였다. 특히 의병부대를 신식무기로 무장한 후 소규모의 정예 의병으로 편성하여 도계(道界)를 넘나들며 유격전을 구사하였기 때문에 일제 군경은 쉽게 진압할 수 없었다. 경술국치 후 국내에 남아 있는 의병세력을 탄압하고 대대적인 초멸(勦滅)작전에 들어간 일제는 의병부대에 대한 수색작전을 한층 강화하였다. 1913년 12월 초순에는 황해도 지경리헌병파견소원(黃海道地境里憲兵派遣所員)이 곡산군 상도면내에서 잠복중인 부하 1명을 체포하였고, 1914년 1월 8일에도 2명을 붙잡았다. 수색의 강도도 강해져 각 헌병분대에서 산간계곡 등 은신처를 중심으로 야간수색을 실시하여 의병들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주었다. 1914년부터는 전담할 수색부대를 편성한 후, 그해 9월부터 평양헌병대 중좌 오하시(大橋) 헌병대장 직속으로 헌병상등병 1명과 보조원 4명으로 구성된 5개 수색반을 운용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의병장 체포라는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에서 예산 문제가 대두되자, 1915년 4월부터는 전담 수색반이 헌병상등병 1명과 보조원 2명으로 구성된 3개 수색반으로 축소되었다. 하지만 의병부대의 주요 활동지역인 성천군 요파(了坡)·귀인(歸仁)·곡창의 출장소에 배속시켜 비교적 효율적으로 운용하려고 하였다. 또한 1914년 11월에는 280원의 현상금도 내걸어 체포에 전력을 기울였다. 1915년 7월 5일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성천군 영천면(靈泉面) 처인리(處仁里)의 부호 한정열(韓正烈)을 찾아가 10,000원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전달받고 출동한 성천분대 요파출장소 헌병 상등병 다나카(田中瀧雄)와 감독보조원 박성빈(朴聖彬) 외 1명에게 밤 11시경 산중에서 나오다가 급습을 받았다. 이때 총검으로 가슴을 찔리는 부상을 당하였지만 상등병을 제압하였다. 그러나 뒤쫓아 온 감독보조원과 합세한 상등병과 30여 분간 사투를 벌였지만 끝내 붙잡히고 말았다. 격투 과정에서 일제 상등병은 양 뺨과 두 손의 첫 손가락에 중상을 입었고, 보조원도 4군데나 중상을 당하였다. 그해 7월 8일 평양헌병대 본부로 이송되었고, 다음날인 7월 9일 오후까지 음식을 거부하며 단식투쟁을 하였다. 7월 9일 오전부터 평양헌병대에서 헌병 중위 후루야(古谷)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오후까지 지속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음료를 마시기는 하였지만 내내 비협조적이었고, 특히 의병 동료에 관해서는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조사 이후 평양감옥으로 이감되었고, 관련 서류는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부하였던 임병린(林炳麟) 역시 조사를 마치고 7월 24일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이 과정에서 은닉한 총 21정, 칼 3자루, 차는 칼 11자루, 탄환 498발 등이 발각되었다. 또한 이후 체포된 부하들로부터 압수한 무기도 총 17정, 탄약 130발, 기타 수백점이나 되었다. 같은 해 8월 28일부터 평양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진행되었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자신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므로 조금도 수치스러운 마음이 없으며 의를 위해 죽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또한 ‘의병장이 되어 침식을 잊어버리고 갈충위민(竭忠爲民)의 책임을 절감하며 중대한 임무를 수행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자기 나라를 위하고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자를 강도·살인 기타 종종의 오명을 씌우는 법률에 불복하였으며, 생과 사는 천하의 이치이므로 위업을 성취하지 못한 것을 슬퍼할 뿐 의로써 죽는 것이 기쁘므로 추호도 여한이 없노라’고 진술하였다. 이어서 ‘위정자의 본령이 충효 두 글자에 불과하므로 구차한 법을 부당하게 적용하지 말고 내란죄로 처벌하라’고 요구하였다. 하지만 평양지방법원에서 살인·강도죄로 사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같은 해 9월 초순 자살을 기도하였지만 실패하여 미수에 그쳤다. 9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살인·강도죄를 적용하는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결국 사형이 확정되었다. 재차 상고하며 강도·살인죄명으로 교수대에서 죽기는 싫으므로 의적의 명분으로 사형에 처해달라고 주장하였지만, 그해 10월 28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11월 4일 오후 2시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심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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