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始大
韓始大1889. 9. 18 ~ 1981.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민회
- · 대한인국민회
- ·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5) 1889년 9월 18일 황해도 해주군(海州郡)에서 한준상(韓俊相)과 문성선(文聖善)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4년 9월 4일 호놀룰루(Honolulu) 한인기숙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박영숙(朴瑛淑)과 혼인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동생 한영대(韓永大)는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서 의사로 활동하였다. 1903년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이주하여 1906년 한인기숙학교가 개교할 때 입학하였다. 한인기숙학교는 하와이 한인과 하와이 감리사의 도움으로 개교하였다. 1909년 9월 호놀룰루 시내에 있는 밀스(Mills)학교로 전학하였다. 밀스학교는 1892년 중국인 남학생을 위해 설립되었는데 한인들도 다수 수학하였다. 1913년 7월 22일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로 이주하여 로웰(Lowell)고등학교 4학년에 편입한 다음, 동생과 함께 졸업하였다. 박영숙과 혼인한 후 1915년 캘리포니아주 맨티카(Mantica) 지방에서 한인 60여 명과 사탕무 농사를 시작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150에이커 규모의 농장은 멘티카 한인 농장 중에서 두 번째로 컸다. 다뉴바(Dinuba)와 딜레노(Delano)에서 포도농사와 채소 농장 등으로 확대하는 등 30여 년간 농장 사업을 지속하여 한가기업회사(韓家企業會社)를 설립하는 등 성공한 한인 농업인이 되었다. 1916년 4월 부친 한준상을 도와 대한인국민회 멘티카지방회를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멘티카지방회에서 부친이 초대 회장으로 선출될 때 법무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6월 다뉴바로 이주하여 10월 7일 대한인국민회 다뉴바지방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17년에는 다뉴바지방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북미지방총회 대의원회에 참석하였다. 1918년에는 홍언(洪焉)과 의안존발위원으로 북미지방총회에 관여하였다. 또한 새해 사업인 『신한민보』 신식 식자기계 변경과 재미한인의 유학 장려와 함께 한글 사용을 장려하고 버클리(Berkeley)에 한인학생양성소를 설치하는 등 민족교육 강화를 위해 힘썼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개최에 맞춰 대표자를 파견하여 한국의 실정을 알리고 독립을 호소하였다. 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여 보내기도 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후 대한인국민회가 독립의연금 등 모금활동을 전개하자, 가족 전체가 큰 금액을 납부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이승만이 설립한 구미위원부의 지원으로도 이어졌다. 1921년 2월 27일 사병순(史秉淳)과 함께 구미위원부 다뉴바지방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임되어 1,750달러를 모금해 구미위원부에 전달하였다. 이 외에도 부모형제 및 배우자 명의로 특별외교비를 지원하였다. 그해 11월 25일 국민대표회기성회 결성에 참여하여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지지하였다. 1924년에는 다뉴바한인국어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여 한인 2세대들의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1930년 7월 14일 부친 한준상이 국어학교인 태극학교를 설립할 때 재정지원과 더불어 자택을 학교 건물로 제공하였다. 1931년 6월 13일에는 교감이 되었다. 1930년 9월 21일 딜레노지방회를 설립하고 1932년까지 회장으로 3·1운동 기념식과 국치일 기념식을 거행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으며, 만주사변 발발 이후에는 만주의 한인과 중국의 항일전쟁을 후원하였다. 1935년부터 딜레노 대의원으로 대한인국민회 총회 본부와 교류하며 한인사회의 현안을 해결하였다. 1936년 5월 김정진·송태은과 발전책실행위원에 선임되었고, 딜레노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인사회의 통일과 국민회 중심의 합동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였다. 1937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에 김호(金乎)가 추대될 때 송종익(宋鍾翊)과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38년 1월 1~2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2차 대표대회에서 의장으로 9개 조의 의안을 의결하였다. 로스앤젤레스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신축 당시 건축준비위원으로 참여하여 황사용(黃思溶)과 검사원으로 신축에 도움을 주었고, 별도로 200달러의 신축자금을 기부하였다. 1939년 4월 6일 대한인국민회 국어교과서 편찬위원장에 선임되어 교과서 편찬경비 모금 등에 노력하였다. 1940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신한민보』의 새로운 식자기계 구입을 통해 신문 발간을 원활하게 하였고,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창설을 후원하였다. 1940년 4월 20일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가 개최되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재미한인사회를 결집시키고 통일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미주 9개 단체 대표가 모였다. 이때 부의장에 선출되어 독립전선의 통일, 임시정부 봉대, 군사운동, 주미위원부 설치, 미국 국방공작의 원조, 독립자금으로 재정통일, 한족연합위원회 설치 등이 담겨있는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작성하였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2월 11일 미국이 일본에 승리하여 한국 광복의 기회가 올 수 있도록 미국을 돕자는 내용의 특별포고를 발표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고 로스앤젤레스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가 설치되자 집행부 위원 및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43년에 다시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1944년과 1945년에는 집행부 위원장에 선출되어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이끌었다. 1944년 10월 28일부터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재미한인전체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주석으로 전체대표대회를 주관하여 주미외교위원부의 새로운 집행부를 조직하였다. 새로운 집행부에 김원용(金元容) 위원장과 더불어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대회 결과를 충칭의 임시정부에서 받아들지 않자, 1944년 6월 개별적으로 워싱턴사무소를 설치해 독자적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4월 국제연합창설대회가 개최되자 집행부 위원장으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고 국제연합 창설대회에 대응하는 선전·외교활동을 추진하였다. 임시정부대표단과 통합하여 한인대표단을 만들어 이승만과 공동으로 “식민지 민족의 자유와 국권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국제조직의 창설을 지지한다”는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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