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斗弼
崔斗弼1887 ~ 1930. 7. 20
관련 단체
- · 단천산림조합
포상 정보
- · 애족장(2002)
관련 사건
- · 단천산림조합 반대 투쟁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2) 자료의 한계로 정확한 출생시기와 출신지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없다. 기록에 따르면 1887년생으로 추정된다. 활동 당시에는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하다면(何多面)에 거주하였다. 1930년 단천군 주민들과 함께 단천산림조합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 단천군 주민들은 주로 땔나무와 숯 판매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래서 단천군에서 산림은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생존수단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강압적으로 삼림조합을 조직하여 개인들이 소유한 산림에서도 나무를 채취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한국인에게 부당한 산림정책을 실행하고 삼림자원을 감시할 목적으로 경찰력과 행정력을 동원하여 강제적으로 삼림조합을 운영하였다. 또한 삼림조합이 군 단위 조합으로 확대·개편되면서 주민들은 나무를 채취하지 못하는 것에 더해서 과도한 조합비까지 부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삼림간수(森林看守)의 횡포는 더욱 심해져 주민들의 생존이 위협받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1930년 7월 단천군 하다면 연대리에서 산림조합 간수가 삼림단속 중 연대리 주민 허달규(許達圭)를 도벌(盜伐) 혐의로 취조하려다가 허달규의 부인을 구타하고 감금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과 농민조합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200여 명의 시위대가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단천군 주민들은 이 문제가 면사무소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그해 7월 18일 단천군청으로 항의하러 가서 일제 경찰과 대치하였다. 그러자 일제 경찰은 “해산하면 좋은 방향으로 처리하겠다”고 회유하며 시위대를 일단 해산시켰지만, 그날 밤 즉시 주도자 20여 명을 검거하는 등의 탄압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에 격분한 주민 400여 명이 7월 19일 단천군청으로 찾아가 군수와의 면담과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일제 경찰의 위협에 또다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하다면·복귀면·파도면의 농민들을 중심으로 군민대회를 개최하고, 일제의 강압적인 삼림조합의 해체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7월 20일에는 2,000여 명의 단천군민들이 단천군청을 공격하고 단천경찰서로 가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일제 경찰과 충돌하였다. 이때 마을 주민들과 함께 단천군청과 단천경찰서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상황이 불리해지자 일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고, 결국 총격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최보영⋮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