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梵燮
洪梵燮1900. 1. 16 ~ 1973. 1.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청양군 정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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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0년 1월 1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의 경찰로 총순(摠巡)을 역임한 홍병태(洪秉台)의 외아들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호는 소석(笑石)이다. 1907년 관직에서 물러난 부친을 따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백곡리(白谷里)로 이주해 성장하였다. 1912년 정산공립보통학교(定山公立普通學校)에 진학하였으나, 일제 식민교육을 견디지 못하여 3년 만에 자퇴한 후 향리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1일 고종 인산(因山)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하였는데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참여한 후 정산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때 종로(鐘路)의 여관에서 입수한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귀향한 후, 평소 시국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교류하던 윤석희(尹錫禧)·임의재(任毅宰)·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을 자택으로 초대하였다. 4월 5일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의 상황을 설명하고 독립선언문을 보여주면서 정산에서의 만세시위를 제안하였다. 그러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제안에 찬성하였다. 마침 그날이 정산시장의 장날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만세시위를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정산면 서정리(西亭里) 정산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날의 정산면의 만세시위는 다음날인 4월 6일에도 계속되어 인근 청양군 목면(木面)의 만세시위로 이어졌다. 자택에서 동지들과 함께 급히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오후 3시경 임의재·홍세표·윤석희 등과 함께 서정리에 위치한 정산시장으로 이동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시장의 한복판으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시장에 나온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장날 만세시위 발생을 대비해 정산헌병분견소(定山憲兵分遣所) 소속 일제 헌병들이 정산시장의 북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즉각 출동한 일제 헌병들이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며 주도자들을 시장 밖으로 내쫓았고, 30여 명을 붙잡았다. 시장 외곽으로 밀려났던 시위대를 지휘해 다시 정산시장으로 들어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재차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면서 임의재·윤석희 등과 함께 “한국은 이미 독립했으니 독립만세를 외치자”고 시장에 나온 주민들에게 호소하였다. 이에 100여 명의 주민들이 취지에 공감하며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태극기를 흔들며 시장의 곳곳을 행진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서 구금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로 이동하였고, 시위대와 함께 일제 헌병을 공격하였다. 이처럼 만세시위가 확대되자 일제 헌병들이 즉각 해산을 명령하면서 발포하였다. 붙잡힌 주도자 대신 시위대를 이끌던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直員) 권흥규(權興圭)가 총격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이를 계기로 4월 6일에도 이웃한 목면까지 만세시위가 이어지면서 거행되었다. 만세시위 과정에서 박상종·임의재·윤석희·홍세표 등과 함께 붙잡혀 연행되었고, 조사를 받은 후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해 같은 해 6월 1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다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자신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근거하여 의사 발동한 것으로 범죄가 될 수 없다’라며 상고하였지만, 그해 7월 26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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