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在其
許在其1887. 10. 28 ~ 1969. 12. 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고성군 회화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7년 10월 28일 경상남도 고성군(固城郡) 구만면(九萬面) 저련리(苧蓮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한 허재기(許在基)를 썼다. 의생(醫生)이었고, 친척의 토지를 소작하였다. 1919년 3월 30일 고성군 회화면(會華面) 배둔리(背屯里) 배둔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 등에서 거행된 만세운동은 경남에도 파급되어 3월 2~3일경 이후 전반적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경남 지역은 진주의 기생, 밀양의 승려, 통영의 면사무소 직원 등과 같이 다양한 계층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일본인에 대한 지역적 반감에서 크게 기인하였으며, 고성 지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구만면에서는 고성군 고성면 읍내보다 일찍 만세시위가 거행되었다. 구만면의 최정주(崔正周)·최낙희(崔洛僖) 등에 의해 만세시위를 준비하기 위한 사전 밀회 과정에 일찍부터 참여하였다. 최정주 등과 함께 1919년 3월 30일 오후 1시경 나팔소리를 신호로 국천사장(菊川沙場)에서 개천리(介川里)·마암리(馬岩里)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최정원이 먼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이어서 공약 3장을 낭독한 후 만세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이를 준수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회화면 배둔리에 위치한 배둔장터로 이동해 만세시위를 확대해 벌이기로 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배둔장터로 이동하자 만세시위를 막기 위해 일제 군경이 가로막았다. 하지만 시위대와 더불어 나팔을 불며 배둔장터로 진입하였고, 서찬실(徐贊實)·김갑록(金甲錄) 등이 주도하는 배둔리 시위대와 합류하자 규모가 5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일제 군경이 고성에 있는 재향군인회까지 동원하였지만, 시위대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시위대와 함께 약 3시간 동안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해산하였다. 그리고 귀환한 후에는 대한독립동맹(大韓獨立同盟)의 명의로 「한인관리퇴직권고문(韓人官吏退職勸告文)」을 작성해 구마면사무소로 들어가 이를 등사·배포하도록 요구하면서, 일제의 통치기구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의 퇴직을 권고하였다. 1920년 (음)10월 중순경 임시정부의 요원 곽정곤(郭正坤)과 접촉하여 국내에서의 군자금 모집 활동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고성군 마암면(馬岩面) 장산리(章山里)에 거주하는 친척 허종택(許宗澤)의 집으로 가서 숙박하면서 밤에 군자금으로 200~300원을 헌납하도록 요구하였다. 다음날 아침 허종택이 곽정곤에게 10원을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21년 2월 19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같은 해 4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었지만 다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해 5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미결기간을 합하여 약 2년 동안 대구형무소와 마산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구열회⋮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