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泰濟
韓泰濟1881. 6. 19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관련 사건
- · 신남면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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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2) 1881년 6월 19일 태어났다. 본적은 함경남도 장진군(長津郡) 신남면(新南面) 신하리(新下里)이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신남면 3월 14일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함남 서북부의 내륙인 개마고원에 위치한 장진군은 부전령산맥(赴戰嶺山脈)의 황초령(黃草嶺)을 넘어야 함흥(咸興)으로 연결되는 지리적 요인으로 인하여 만세시위 소식이 비교적 늦게 전달되었다. 따라서 장진군의 만세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늦은 1919년 3월 14일 시작되었다. 3월 14일 오후 4시 신남면 고토리(古土里) 수시(水市)에는 고토리와 인근 만풍리(萬豊里)·신중리(新中里)·신하리·신흥리(新興里)·중흥리(中興里) 등에서 모인 2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하였다. 이때 같은 신하리의 이규연(李奎淵)과 함께 고토리의 최정하(崔正夏)와 한창순(韓昌順), 만풍리의 한하용(韓夏鏞), 신중리의 김면숙(金冕淑)과 김상락(金尙洛), 중흥리의 윤복민(尹福民)·이병찬(李炳燦)·이우승(李愚昇)·최안재(崔安在)·한계유(韓啓維)·한면각(韓冕珏)·한승풍(韓承豊)·한영태(韓永泰)·한창혁(韓昌赫) 등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고토리헌병주재소로 행진한 시위대는 주재소 앞에 집결하여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그리고 일부 시위대는 주재소로 들어가서 장진과 함흥을 연결하는 전화선을 절단하였다.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기 위해 헌병들은 칼과 몽둥이를 휘둘렀다. 이에 시위대는 헌병들에 대항하면서 주재소 안으로 쇄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헌병의 발포로 시위대 2명이 사망하였다. 전신 시설의 파괴로 인해 외부와 연락이 두절되자, 헌병보조원 1명이 주재소를 탈출하였다. 탈출한 헌병보조원은 헌병대로 가서 헌병 하사 1명과 헌병보조원 2명, 그리고 보리 수매차 함흥군에서 파견된 창고 근무 계수(計手) 1명이 행방불명되었다고 거짓 보고를 하였다. 이에 신남면의 면 소재지인 하갈우리(下碣隅里)에 있던 하갈우리헌병대주재소는 고토리로 헌병들을 급파하였다. 헌병들은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고, 그 과정에서 100여 명의 시위대가 붙잡혔다. 200여 명의 시위대 가운데 100여 명이 붙잡히는 가혹한 탄압은 오히려 장진군의 만세시위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14일 헌병의 무차별 체포 과정에서 김면숙·김상락·김정순(金正淳)·김창심(金昌深)·박민연(朴珉淵)·엄준섭(嚴俊燮)·원이돌(元李突) 등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6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으나 판결에 불복하고 항고하였고, 8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당했다. 형이 확정되었다. 이에 재차 불복하여 상고하였지만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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