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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天奉

韓天奉

1892. 2. 18 ~ 1971.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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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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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청양(靑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청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4)

관련 사건

  • · 정산면 정산시장 3.1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4) 1892년 2월 18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대박리(大朴里)에서 태어났다. 정산시장 만세시위와 권흥규 운구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충남 청양군 정산면의 만세운동은 백곡리(白谷里)의 홍범섭(洪梵燮)을 중심으로 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이 주도하여 시작되었다. 4월 5일 오후 3시경부터 홍범섭 등은 정산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에 나온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며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장날의 만세시위를 경계하고 있던 일제 헌병들이 즉각 출동하여 만세시위의 해산 명령과 함께 시위를 주도한 30여 명을 청양헌병분견소로 강제 연행하였다. 일제 헌병이 만세시위자들을 강압적으로 연행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보고 분노하여 만세시위에 동참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열창하였다. 연행된 만세시위 주도자들을 대신하여 시위대는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直員) 권흥규(權興圭)가 지휘하였다. 권흥규의 지휘에 따라 700여 명의 만세시위대와 함께 헌병분견소로 쫓아가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항의와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를 이끌던 권흥규가 일제 헌병의 발포로 사망하면서 이날의 시위는 황망함 속에 해산되었다. 다음날인 4월 6일 아침 전날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헌병주재소로 갔다. 연락을 받고 온 권흥규의 친인척들과 함께 시신을 인수하여 고인의 자택이 있는 목면(木面) 안심리(安心里)로 향하는 운구에 참여하였다.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고 쓴 명정(銘旌)을 선두에 세운 운구행렬이 지나는 길목 마다 많은 주민들이 통곡 속에 운구행렬에 합류해 왔다. 운구행렬이 지곡리(池谷里)를 지날 즈음 ‘조선독립만세’가 연창되면서 운구행렬과 만세시위대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일제는 대규모의 만세시위대가 된 운구행렬을 해산시키기 위해 인근 지역의 헌병까지 안심리 방향으로 급파하였다. 공주(公州)에서 파견된 헌병대는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이동하는 권흥규의 운구행렬을 보자마자, 무차별로 발포하였다. 이 결과 권흥규의 조카딸과 명정을 쓴 권영진(權寧鎭)·김국삼(金國三)·유행길(柳行吉)·장응렬(張應烈)·윤광원(尹光遠)등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면서 운구행렬과 함께 진행되었던 만세시위는 해산되었다. 뒤이어 진행된 일제 헌병의 만세시위 참여자에 대한 조사, 색출과정에서 붙잡혔다. 청양헌병분견소의 조사를 거쳐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이 인정되어 즉결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24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의 처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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