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昌赫
韓昌赫1881. 9. 20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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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2) 1881년 9월 20일 함경남도 장진군(長津郡) 신남면(新南面) 중흥리(中興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신남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장진군은 교통이 불편한 지역에 있어서 만세시위 소식이 비교적 늦게 전달되었다. 이러한 지리적 요인으로 장진군의 만세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늦은 1919년 3월 14일 시작되었다. 3월 14일 오후 4시 신남면 고토리(古土里) 수시(水市)에는 고토리와 인근 만풍리(萬豊里)·신중리(新中里)·신하리(新下里)·신흥리(新興里)·중흥리 등에서 모인 2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때 고토리의 최정하(崔正夏)와 한창순(韓昌順), 만풍리의 한하용(韓夏鏞), 신중리의 김면숙(金冕淑)과 김상락(金尙洛), 신하리의 이규연(李奎淵)과 한태제(韓泰濟), 그리고 같은 중흥리의 윤복민(尹福民)·이병찬(李炳燦)·이우승(李愚昇)·최안재(崔安在)·한계유(韓啓維)·한면각(韓冕珏)·한승풍(韓承豊)·한영태(韓永泰) 등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고토리 헌병주재소로 향해 행진한 시위대는 주재소 앞에 집결하여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시위대 가운데 일부는 주재소로 들어가서 함흥과 장진을 연결하는 전화선을 절단하였고, 헌병들은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며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려 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헌병들에 대항하며 주재소 안으로 쇄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헌병들의 발포로 시위대 2명이 사망하였다. 전신 시설의 파괴로 외부와 연락이 두절되자, 고토리헌병주재소의 헌병보조원 1명이 주재소를 탈출하였다. 탈출한 헌병보조원은 헌병대에 헌병 하사 1명과 헌병보조원 2명, 그리고 보리 수매차 함흥군에서 파견된 창고 근무 계수(計手) 1명이 사망하였다고 거짓 보고를 하였다. 이에 신남면 하갈우리(下碣隅里)의 하갈우리헌병대주재소는 고토리로 헌병들을 급파하였다. 헌병들은 무력을 사용하여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 과정에서 200여 명의 시위대 가운데 100여 명이 붙잡혔다. 이러한 가혹한 탄압은 장진군의 만세시위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달 14일 헌병의 무차별 체포 과정에서 김면숙·김상락·김정순(金正淳) 등 27명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6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고, 같은 해 8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지만 그해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당하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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