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承龍
韓承龍1885. 2. 6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1)
관련 사건
- · 1919년 용천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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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11) 1885년 2월 6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고성면(古城面) 신도(新島)에서 태어났다. 1919년 3~4월에 일어난 평북 용천군(龍川郡)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용천군 만세시위는 각지에서 수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다. 용천군 최초의 만세시위는 3월 4일 양시(楊市)에서 시작하였다. 이때 천도교도와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부하였으며, 약 5,000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당일 밤 9시경에는 600여 명이 모여 손에 등불을 들고 행진하였다. 이날의 시위에서는 20여 명이 붙잡혀 심문을 받았다. 3월 6일에는 남시에서 약 200명이 시장 내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고창하였다.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해산하려고 하였으나 열광적인 기세에 실패하였고, 결국 일본군 보병 6명의 지원을 받아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주도자 6명을 검거하였다. 3월 25일에는 용암포(龍岩浦)에서 1,000여 명이 보통학교, 군청, 경찰서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펼치다가 20여 명이 검거되었다. 3월 26일에도 남시에서 시위의 기운이 있었으나 일제 헌병의 삼엄한 감시로 무산되었다. 4월 1일에는 양광면(楊光面) 충렬동(忠烈洞)에서 500여 명의 사람들이 면사무소로 행진하여 면장 이하 직원들에게 사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같은 날 외하면(外下面)에서는 부역에 동원되었던 농민 등 800여 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4월 6일 밤 10시에는 충렬동에서 다시금 5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으며, 일제 헌병의 발포로 1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하였다. 4월 7일 오전에는 읍동면(邑東面)에서 출발한 30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구읍내(舊邑內)까지 진출하였고, 일제 헌병이 발포하며 위협한 끝에 주도자 3명이 붙잡혔다. 이처럼 용천군 일대에서 거행된 만세운동 가운데 참여한 만세시위를 특정할 수 없지만, 이일로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25일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아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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