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壯蕃
韓壯蕃1883. 3. 7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1)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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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11) 1883년 3월 7일 함경남도 정평군(定平郡) 춘류면(春柳面) 신하리(新下里)에서 태어났다. 이발사업을 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정평군 춘류면 신하리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평소 조선이 독립하여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1919년 3월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그 여파가 정평군까지 미쳐 3월 7일부터 정평면(定平面)과 주이면(朱伊面) 등에서 만세시위가 빈발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기회로 삼아 평소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정평군 춘류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우창기(禹昌箕)·원세공(元世空)·이석관(李錫觀) 등과 상의하여 신하리 장날인 3월 13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그리고 만세시위에 사용하기 위해 2척 크기의 정방형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신하리 장날 우창기·원세공·이석관 등과 함께 시장 중앙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시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대한국만세’를 부르라고 권유하였다. 그러자 400~5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일제히 따라 ‘대한국만세’를 외쳤다. 이후 정오부터 300여 명에 달하는 시위대를 선두에서 이끌며 신포리(新浦里) 어시장과 신상리(新上里) 시장 안을 돌면서 ‘대한국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날 오후 1시경 무려 4,000여 명으로 급격히 증가한 시위대와 함께 정평군 춘류면 신하리에서 허봉(許鳳)이 경영하는 여인숙 앞으로 가서 ‘대한국만세’를 외쳤다. 때마침 이 주위를 순찰 중이던 일제 헌병이 이를 발견하고 현장으로 달려가 강제로 해산을 명령하였다. 일제 헌병의 제지에 시위대는 잠시 만세시위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지만, 곧 다시 사람들 앞에서 태극기를 크게 휘두르며 독려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힘입어 시위대는 태극기를 흔들며 재차 ‘대한국독립만세’를 연호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4,000여 명에 달하는 시위대를 이끌고 신하리·신포리·신상리 사이를 왕복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대규모의 시위대를 진압할 능력이 없었던 일제 경찰은 일단 만세시위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날 오후 6시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우창기·원세공과 함께 붙잡혔고, 만세시위에서 사용하던 태극기 3장도 압수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도 해산하였다. 1919년 4월 14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해 4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4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노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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