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贊衡
崔贊衡1878. 2. 26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1919년 황주군 황주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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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1878년 2월 26일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인교면(仁橋面) 묵치리(墨峙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일 황주군 황주면(黃州面) 남천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평남 중화군(中和郡)의 최창룡(崔昌龍)으로부터 만세운동 소식과 함께 독립선언서 10장을 전달받은 황주면 천도교구의 교구장 김성준(金聲駿)과 교훈(敎訓) 황기타(黃己拕) 등은 천도교도들이 모이는 일요일이자 남천장터의 장날인 3월 2일에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평소 일제의 한국병합 이후 독립의 날을 밤낮으로 염원하고 있다가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와 일부 식민지의 해방 소식을 듣고 용기를 내어서 한국 사람된 의무를 다하고자 3월 2일 남천장터에서 거행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3월 2일 오후 2시경 황기타는 천도교도를 이끌고 남천장터로 이동한 후 사람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조진영(趙鎭永)은 남천장터에 모인 주민들에게 독립선언서의 취지를 연설하면서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때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장 일대를 행진하였고, 황주성 안의 황주경찰서 앞으로 이동하였다. 일제 경찰 10여 명이 나와 시위대를 무력으로 제지하는 과정에서 김병식·강형섭(康亨燮) 등을 붙잡아 경찰서 안으로 연행하자, 시위대와 함께 체포된 사람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였다. 주도자 일부와 시위대 40여 명이 황주경찰서 안으로 들어가 강하게 항의하자, 시위대와 함께 돌을 던져 경찰서 유리창 등을 파손하였다. 이어서 시위대와 함께 예수교 예배당으로 이동해 대오를 정비한 후, 합류한 기독교인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오후 5시경 시위대가 천도교구실로 이동해 휴식을 취하던 중 일제 경찰들이 갑자기 내부로 들어와 주도자 등을 체포하였다. 이때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이 일로 1919년 일자미상일에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해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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