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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在錫

崔在錫

1897. 1. 19 ~ 1958.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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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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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安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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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7년 1월 19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내가천리(內加川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최재식(崔在植)이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4월 안성군 원곡면·양성면(陽城面)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1일 양성면 동항리(東恒里)에 위치한 양성공립보통학교와 읍내에 위치한 안성공립보통학교의 재학생들이 교내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날 학생들의 만세가 안성군 만세시위의 기폭제가 되지는 못했지만, 안성군 일대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는 만세시위에 동참하자는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안성군 원곡면에서는 칠곡리(七谷里)에 거주하는 이유석(李裕奭)과 홍창섭(洪昌燮), 내가천리에 거주하는 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남현서(南玄西), 외가천리(外加川里)에 거주하는 이근수(李根洙)·이희룡(李熙龍) 등이 원곡면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하기 위해서 마을 사람들의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3월 28일 이덕순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외가천리에 위치한 원곡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후 원곡면사무소에서는 4월 2일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4월 1일 원곡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날 밤 면사무소가 위치한 외가천리를 비롯해서 내가천리·칠곡리·지문리 등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시위대 규모는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원곡면 시위대는 원곡면사무소에서 횃불을 들고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시위대의 일원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양성면의 성은고개를 넘어서 양성면에 위치한 양성주재소로 행진하였다. 밤 9시 50분 무렵 원곡면 시위대와 함께 양성주재소에 도착하였다. 그때 마침 양성면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마치고 해산을 준비하고 있었다. 원곡면 시위대와 양성면 시위대는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시위대 규모는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와 함께 양성면 경찰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면서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이양섭(李陽燮)·김영서(金永西)·이인군(李仁君)·김봉현(金鳳鉉)과 함께 주재소 사무실에 방화함으로써 주재소의 집기·서류 등을 파손시켰다. 이어서 시위대와 함께 몽둥이를 가지고 양성면 우편소로 가서 기물 등을 파손시켰다. 시위대 일부는 우편소의 전화기를 파손시키고 인근 전신주 3개를 쓰러뜨림으로써 양성면 일대의 통신을 두절시키고자 하였다. 한편 이태호(李泰鎬)·최재익(崔在翊)·김환기(金煥基)와 함께 일본인이 운영하는 잡화점으로 가서 돌을 던지면서 잡화점 일대를 파손시켰다. 다른 시위대는 일본인 상인과 대금업자의 가옥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에 일제 군경은 강경 진압을 시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다. 일제 군경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시위대 5명이 사망하였다. 4월 2일 새벽 4시 무렵 시위대와 함께 원곡면사무소로 이동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원곡면사무소를 향해 투석전을 전개하기도 하였으며, 일부 시위대는 면사무소의 숙직실을 비롯한 건물에 방화하기도 하였다. 시위가 끝난 이후, 안성경찰서장을 필두로 일제 군경은 원곡면으로 출동하였다. 일제 군경은 면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을 습격한 인사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최항진(崔恒鎭)이 일제 군경의 구타로 사망하였다. 만세시위에 참여한 일로 일제 군경에 붙잡힌 뒤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죄, 소요죄 등으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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