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長燮
崔長燮1892. 12. 5 ~ 1970. 2.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화성군 장안면.우정면(4.3)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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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2년 12월 5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우정면(雨汀面) 화수리(花樹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최장관(崔長官)이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3일 인접면인 수원군 장안면(長安面)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우정면과 장안면 일대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6일부터 천도교 전교사와 각 마을 구장(區長)의 주도로 기획되었다. 천도교 전교사와 각 마을 구장들은 사전에 일본인 순사 처단반과 주재소 및 면사무소 방화반을 조직한 뒤, 면민들을 이끌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치밀한 준비 끝에 4월 1일 밤 장안면 장안리에서 횃불 시위가 일어났다. 다음날 밤 9시에는 차병혁(車炳爀)·차희식(車喜植)·이영쇠(李永釗) 등의 주도로 두 면의 거의 모든 곳에서 횃불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본격적인 시위가 전개된 것은 4월 3일 아침부터였다. 오전 8시 사전에 집결장소로 지정된 장안면 석포리(石浦里)로 면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이때 각 집을 돌며 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한 뒤, 면민들을 이끌고 이에 합류하였다. 어느 정도 사람들이 모이자 시위대는 밀양산으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다른 동리에서 온 시위대와 합류해 장안면사무소까지 태극기를 휘두르고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면사무소에 다다르자 사전에 준비해 둔 몽둥이로 면사무소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그리고 면장 김현묵(金賢默)을 끌어내 운동에 합류할 것을 요구한 뒤, 김현묵을 끌고 부근 쌍방산(雙方山)에 올라 만세를 불렀다. 이 산은 장안면과 우정면 사이에 위치한 해발고도 116m의 작은 산으로서, 이곳에서 만세를 부른 것은 시위 사실을 널리 알려 더 많은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운동 참가자가 1,500여 명에 달하였다. 오후 3시 고무된 시위대를 이끌고 우정면사무소로 향해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서류와 집기를 불태웠다. 그러한 뒤 2,0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를 이끌고 이번에는 4km 떨어진 화수리경찰주재소로 향하였다. 오후 5시 도착해 돌을 던지며 일제 경찰과 교전한 끝에 주재소를 불태우는 데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순사 가와바타(川端)가 쏜 총에 장안면 출신 이경백(李敬伯)이 맞아 사망하자, 시위대와 함께 가와바타를 몽둥이로 내려쳐 처단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밤중 횃불을 들고 산에 올라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만세시위에 참여한 일로 1919년 7월 중순 일제 경찰에 붙잡혀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방화죄, 살인죄, 소요죄, 내란죄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1년 동안 수원경찰서에 구류된 채 예심재판을 받았다. 피 묻은 몽둥이를 들고 있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가 수 명 존재하고, 검경의 모진 고문과 압박이 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운동 참여와 순사를 처단한 사실을 부인하였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그해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받았다. 최종 판결을 받기까지 1년 5개월 이상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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