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日成
崔日成1868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3)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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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3) 강원도 통천군(通川郡) 순령면(順嶺面) 하고저리(下庫底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당시 52세이므로 1868년생으로 추정된다.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6~7일 통천군 순령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5일 밤 청년 부두 노동자 2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였다. 청년들의 만세 소리에 서당 생도와 노동자들이 합세하면서 200여 명의 군중들이 부두와 거리에서 만세를 연호하였다. 갑자기 일어난 만세시위에 일제 경찰은 주동자 등 4명을 붙잡으며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다음날인 4월 6일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박기연(朴基淵)·이수정(李守丁)·임낙규(林洛奎)·한창수(韓昌洙) 등 상·하고저리 주민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시위에 앞장섰다. 낮부터 모이기 시작한 군중들은 저녁 무렵에는 1,3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때 이수정·임낙규·박기연 등과 군중들을 이끌고 시위를 주도하였다. 군중들은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우편소 등 관공서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돌과 몽둥이로 일본인 주택과 중국인 상점도 부수며 과격한 시위를 이어갔다. 일제 경찰은 만세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자, 고성(高城)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의 지원을 받아 해산을 시도하였다. 일제 군경이 합동으로 시위대에게 무력을 행사하였으며, 해산 과정에서 발포되어 20여 명이 총격을 입었다. 4월 7일에도 만세운동의 열기는 그대로 이어졌다. 오후 8시경부터 2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펼쳤다. 군중들과 함께 전날과 마찬가지로 면사무소 등 관공서에서 거칠게 시위하였다. 일제는 만세운동 소식에 군경을 급파하여 총을 발포하면서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만세시위에 참여한 일로 붙잡혔다. 1919년 7월 15일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10월(미결구류일수 중 3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같은 해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 징역 8월로 감형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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