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寅植
崔寅植1891. 9. 9 ~ 1948. 5. 1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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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1년 9월 9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양양면(襄陽面) 임천리(林泉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최중헌(崔重憲)이다. 양양보통학교를 1회로 졸업하였으며, 직업은 목수(木手)이다. 1919년 4월 4일 양양군 양양읍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양양읍 만세운동은 이웃 마을 도천면(道川面) 중도문리(中道門里)에 사는 이석범(李錫範)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이석범은 대한제국기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낸 유학자로,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직접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후 이석범은 함평이씨(咸平李氏) 집성촌인 임천리에서 유학자들을 모아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3월 말경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이석범에게 양양읍 만세운동 참여를 제의받고, 이에 동참하였다. 이석범·이교정(李敎貞)·이건충(李建忠) 등과 함께 임천리 이교완(李敎完)의 집을 거점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처남 김명기(金命基)과 함께 양양보통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할 사람들을 모았다. 주도자들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옥양목(玉洋木)을 구하여 태극기를 그리는 등 분주히 움직였다. 거사 전날인 3일 보통학교 졸업생 후배 김필선(金弼善)·김재구(金在龜) 등이 자택에 방문하였다. 김필선은 조화벽(趙和璧)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은 이후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양양읍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때 김필선에게 내일 양양읍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다고 털어놓으면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게 된다. 두 사람의 만남으로 양양읍 만세운동이 유학자 계열과 기독교 계열에서 서로 힘을 모아 일으키게 되었다. 이후 두 계열에서는 임천리를 본거지로 만세운동을 전개하면서 보다 많은 군중을 동원하기 위하여 마을마다 책임자를 두어 주민들을 동원하게 하였다. 그런데 3일 밤 만세운동의 움직임을 포착한 양양군수 이동혁(李東赫)이 군속과 관원들을 데리고 임천리를 급습하였다. 율계(律契)로 위장하여 시위 때 쓸 태극기와 선언서를 만들고 있던 주도자들이 붙잡혔고, 태극기와 선언서도 상당수 빼앗겼다. 다행히 김명기·김재구·김규용(金圭容) 등과 태극기를 가지고 거마리(車馬里)에 있는 이종태(李鐘台)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다른 주도자들과 함께 밤새 태극기를 만들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거사 당일인 4일 아침 이종태를 설득하여 만세운동을 함께 하였으며, 이종태와 함께 선두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거마리와 임천리 주민들을 이끌고 양양읍 장터로 나아갔다. 장터로 가는 길에 만나는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시위대가 양양읍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길목에 배치되어 있던 경찰이 앞을 막아섰다. 한동안 대치상황이 이어졌지만, 시위대는 일제 경찰들을 밀치고 양양읍 장터에 이르렀다. 다른 곳에서는 각 마을 구장들이 책임자가 되어 서·북·동·남·서남쪽으로 주민들을 이끌고 양양읍 장터로 모였다. 장터에 이르자 이미 여러 마을에서 모인 주민과 장꾼들로 가득 찼다. 오전 11시경 주동자들을 대표하여 군중들 앞으로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선창하자 군중들도 다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주동자들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고 장터 곳곳을 행진하였다. 양양읍 인근의 남문리(南門里)·군향리(軍餉里)·서문리(西門里) 등지의 주민들은 김주호(金周鎬)·김봉운(金鳳運) 등 양양교회 청년들의 지도를 받으며 만세시위를 펼쳤다. 점심 무렵 주동자들과 함께 어제 붙잡힌 주동자들의 석방을 위하여 교섭을 시도하였고, 이 과정에서 함홍기(咸鴻基)가 사법주임의 칼에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군중들은 무력항쟁으로 시위 방향을 바꾸어 돌과 몽둥이로 군청과 경찰서를 부수며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밤이 되자 일제 경찰은 어둠을 틈타 시위 군중들을 향하여 발포하였다. 무차별적인 총탄에 권병연(權炳淵)과 김학구(金鶴九)가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고, 노병우·박의병(朴義秉)·한원팔(韓元八) 등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만세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검거 작전에 의해 붙잡혔으며, 태극기 등도 모두 압수당하였다. 1919년 4월 18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같은 해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지만, 형량은 동일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조선 민족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었고, 조선 민족은 모두 독립을 바라며, 조선 독립은 동양평화와도 관련된 문제”라고 항변하며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해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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