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극모
姜極模1890. 6. 23 ~ 1951. 1. 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8)
관련 사건
- · 대한독립군비단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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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8) 1890년 6월 23일 함경남도 풍산군(豐山郡) 안수면(安水面) 장평리(長坪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강극모(姜克模)·김암(金岩) 등을 사용하였다. 29세가 되던 1920년 음력 9월 즈음에 홀로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바이현(長白縣) 17도구(十七道溝)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곧장 이곳에서 윤덕보(尹德甫)와 이동백(李東白)의 권유로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 군비단)에 가입하였다. 군비단은 1919년 3월 이동백의 집에서 윤덕보와 이은향(李殷鄕)·이태걸(李泰杰) 등이 국내의 상황을 탐사한 후 군자금 모집과 무장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다. 단장 이은향, 부단장 이태걸, 군사부장 이동백, 재무부장 윤덕보, 참모 김찬(金燦), 외교부장 조훈(趙勳)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때 군비단 임원 대부분은 함경남도 출신이었다. 대한독립군비단에 가입한 후 윤덕보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모집의 명을 받고 1920년 10월 상순 단원들과 함께 국내에 잠입하였다. 그리고 함남 신흥군(新興郡) 동상면 달아리에 거주하는 박계화(朴啓華)의 안내를 받아 함남 풍산군 옹이면 용문리 김도경(金道敬)의 집에 마을 주민을 모았다. 이 자리에서 박도천(朴道天) 등 주민들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여 2원을 모집하였다. 같은 달 8일에도 풍산군 옹이면 용문리 이병국(李炳國)의 집에 오재진(吳在鎭) 등 여러 명을 모아 군자금 납부를 요구하여 2원을 모집하였다. 1921년 3월 대한독립군비단은 러시아 연해주로 군대 파견을 결정하였다. 이때 윤덕보의 명령에 따라 군비단의 군의(軍醫) 자격으로 이만(Iman) 지역에 파견되어 병원에 배속되었다. 이는 이전에 한의학을 공부한 경험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중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권 회복 방책을 협의하려고 1922년 (음)7월 27일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윤덕보 휘하에 있는 군비단 참위 임표(林豹)의 명령에 따라 7월 상순경 이청천(李靑天) 등과 함께 상하이(上海)로 떠났다. 국민대표회의는 1921년부터 2년 동안 준비 과정을 거쳐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개최되었으며, 권위 있는 중앙 통일 기관의 수립과 독립운동 방략의 수립이라는 목적하에 진행된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 규모의 회의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 개최가 몇 차례 연기되면서, 연내 회의 개최가 무산되자 (음)8월에 상하이를 출발해 다시 이만으로 돌아왔다. 상하이로 함께 이동한 이청천은 고려혁명군 특립연대 대표로서 국민대표회의 군인구락부에 참석하여 창조파로 활동하였다. 이청천의 파견 단체를 미루어보면, 고려혁명군에 함께 소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만으로 돌아오고나서부터 1924년 사이 창바이현 15도구(十五道溝)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의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주소가 창바이현 15도구 운성리(雲城里)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1924년 김순칠(金順七)과 오상호(吳尙浩)·김영천(金永千)이 함남 삼수군(三水郡) 호인경찰서(好仁警察署) 인산주재소(仁山駐在所)에 근무하는 도순사(道巡査) 김원봉(金元鳳)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검거 과정에서 자택에서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1927년 1심에서 6년 형을 선고받고, 3월 경성복심법원 2심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오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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