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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命守

崔命守

1887. 3. 5 ~ 1920.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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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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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盈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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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2007)

관련 사건

  • · 1919년 영덕군 영해면
  • · 병곡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7) 1887년 3월 5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영해면(寧海面) 벌영동(閥榮洞)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영해면과 병곡면(柄谷面)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영덕군의 만세운동은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坪洞)의 북장로회 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을 중심으로 3월 중순부터 준비되었다. 김세영은 3월 상순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가다가 서울에서 거행된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귀향한 후, 3월 12일 낙평동 교회에서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과 만나 거사를 협의하였다. 그리고 김세영은 권태원에게 병곡면 송천동(松川洞) 북장로회 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의 힘이 필요하니 만나서 논의하도록 권유하였다. 이에 정규하와 권태원이 서로 만나 협의한 결과 영해시장 장날인 3월 18일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기독교인과 유림 등을 규합하였다. 3월 18일 정오경 정규하·남효직(南孝直)·남세혁(南世赫)·박희락(朴羲洛) 등은 태극기를 가지고 시장으로 이동하였고, 오후 1시경 영해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정규하 등의 연설로 시작된 만세시위에는 2,000여 명이 참여하였다. 시위대는 사전에 준비한 대형·중형 태극기와 40여 개의 소형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며 시장 일대를 행진하였다. 그러자 영해경찰관주재소 일제 경찰들이 출동해 해산을 명령하였지만, 시위대는 이에 불응하며 저지하는 일제 경찰들을 구타하였다. 이어서 시위대는 주재소로 들어가 곤봉을 휘두르고 기와를 던지면서 항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재소는 기둥과 지붕만 남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이후 시위대는 영해공립보통학교·영해공립심상소학교·면사무소·우편소 등으로 이동하며 만세시위를 지속하였다. 뒤늦게 영덕경찰서에서 일제 경찰이 파견되었으나, 시위대의 압도적인 규모와 열기에 밀려 퇴각하였다. 3월 18일 영해시장에 볼 일이 있어 갔다가 시위대에 합류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영덕경찰서장 일행이 영덕 방면으로 도망갈 때, 정점용(鄭占用)·황선의(黃善儀)·김실광(金實光) 등 40~50명과 함께 이들을 추적하였다. 축산면(丑山面) 상원리(上元里) 최수경(崔壽敬)의 집 부근에서 경찰서장과 순사를 붙잡아 구타하였고, 일제 경찰 등이 착용하고 있던 제복·모자와 휴대하던 검 등을 빼앗은 후 영해로 데려와 미즈모토여관(水本旅館)에 감금하였다. 영해면의 만세시위는 밤늦게까지 지속되었고 다음날인 19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3월 18일 오후 2시 정규하 등은 병곡면으로 진출하여 병곡주재소 앞에서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펼쳤고, 이 과정에서 병곡주재소·면사무소 등의 시설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3월 19일에는 창수면(蒼水面)에서 영해면 만세시위에 동참하기 위하여 이동하던 200~400명의 시위대가 독자적으로 창수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공격하며 만세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영해면의 만세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3월 19일 오전 10시와 오후 5시 대구(大邱)와 포항(浦項)에서 헌병대와 일본군이 투입되었다. 이후 일제 군경의 진압과정에서 8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부상을 입었다. 결국 영해면·병곡면 만세시위 참여자로 붙잡혔고, 검거된 다수의 사람들 가운데 90여 명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 상해죄, 기물손괴죄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였고, 같은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었지만 다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옥고를 겪다가 1920년 5월 31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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