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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道俊

崔道俊

1887. 4. 23 ~ 1942.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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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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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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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임동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7년 4월 23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하면(臨河面) 임하동(臨河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촉발한 만세운동은 곧이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소식은 안동군에도 전파되어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는데, 3월 21일 임동면(臨東面) 중평동(中坪洞) 편항시장(鞭巷市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동수(柳東洙)·유연성(柳淵成)·유교희(柳敎熙) 등은 만세운동을 결의한 후 시위 계획을 동민들에게 알리며 동참을 독려하였다. 주도자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임동면 뿐만 아니라 안동군과 인근 지역에도 21일 편항시장에서 만세운동이 계획되고 있음을 암암리에 알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하고 주저 없이 만세시위 동참을 결심하였다. 거사 당일인 21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 편항시장으로 향하였다. 장꾼과 주민들로 붐비는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오후 2시경 유연성이 군중 앞으로 나와 왜 만세운동을 해야 하는지 연설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유연성의 선창을 신호로 주도자들과 참여자들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소리가 장터 곳곳에 퍼지면서 장꾼과 주민들도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면서 시위대의 사기는 더욱 올라갔다. 그러나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일제 경찰이 현장에 급파되어 시위대를 해산시키면서 충돌이 일어났다. 일제 경찰이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있던 배태근(裵太根)의 뺨을 때리자 이를 목도한 군중이 분노하여 일제 경찰에게 달려가 폭력적 행위를 제지하자, 일제 경찰은 재빨리 주재소로 달아났다. 이어서 분노한 시위대는 유연성·배태근·조학이(趙學伊) 등을 선두로 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에 이른 500여 명의 시위대는 일제 경찰의 권총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재소 출입문을 부수고 들어가 벽과 창문 등을 모두 파괴하였다. 그리고 사무실 안의 비품과 문서도 모두 파기하고, 일제 경찰에게서 빼앗은 대검과 권총, 주재소 안에 있던 무기들도 모두 모아 우물 안에 버렸다. 오후 5시경 유동수·유연성·송병영(宋炳榮) 등과 함께 여세를 몰아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1,5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 앞에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후 몽둥이와 돌로 면사무소 벽과 창문을 부수고 내부의 책상과 가구 등 비품과 장부·서류 등도 모두 파괴하였다. 면사무소의 지붕과 기둥만을 남겨 놓은 채 모두 파괴한 후 만세시위를 이어갔으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만세를 부르다가 자진 해산하였다. 다음날 일제 경찰에 붙잡혀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으로 이감되었다. 5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 건조물손괴죄, 가택침입죄, 상해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곧 항소하였지만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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