陳學哲
陳學哲1896. 2. 26 ~ 1950. 10. 1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9)
관련 사건
- · 서종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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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9) 1896년 2월 26일 황해도 봉산군(鳳山郡) 서종면(西鍾面) 단장리(丹墻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1일 서종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천도교 중앙총부 월보과장(月報課長) 이종일(李鍾一)은 이경섭(李景燮)에게 독립선언서 약 1,000장을 황해도 일대에 전파하도록 하였고, 이경섭은 해주군(海州郡)·수안군(遂安郡)·서흥군(瑞興郡)·곡산군(谷山郡)·봉산군(鳳山郡)·사리원(沙里院)에 이를 다시 배포하였다. 3월 3일 오후 4시경 사리원에서는 이기호(李基浩)·이균형(李均亨) 등이 주도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평소 한국의 국권회복과 독립을 염원하였던 이기호와 이균형은 사리원 일대의 천도교인과 개신교인을 중심으로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그 결과 3월 3일 김승신(金承信)·나한빈(羅漢彬)·전양준(田養畯)·최정건(崔貞健)·함치각(咸致恪)과 더불어 사리원 장터에서 400~5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3일 사리원 만세시위에 고무된 이기풍(李基豊)과 함께 서종면에서의 만세시위를 결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사인면(舍人面) 만화리(萬和里)에 거주하는 간촌(間村)교회 조사(助事) 박기영(朴基永)과도 만세시위를 공모하였다. 3월 11일 오전 9시 단장리에서 개신교도 30여 명이 중심이 된 시위대를 이끌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30여 명이 모인 시위대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후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대를 이끌자, 장터로 가는 장꾼들과 사람들이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또한 소광교회(小廣敎會)에서 개최된 재령·봉산지방 공의회(公議會)에 참석하기 위해서 사인면을 출발한 박기영도 서종면 시위에 함께 참여하였다. 일제 헌병은 서종면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고 검문을 강화함으로써 시위대가 사리원 장터로 진입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해주지방법원 서흥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지만, 1919년 5월 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해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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